9장. 언어와 마음
불립문자, 교외별전
선가, 그들은 실재와 언어를 어떻게 이해한 것인가? 선사들은 언어를 무엇으로 이해하였고 언어와 실재, 언어와 존재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였는가? 그들에게 있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청정심을 얻는다는 것, 부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교의 한 종파로서의 선종에 있어 언어가 의미하는 바가 유가나 도가에서의 언어이해와 어떻게 다른가를 밝혀보기로 한다. 그리고 다시 불교적 언어관이 현대의 사적 언어를 부정하는 언어사용론자들의 언어관과 어떤 점에서 구분되는가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소위 비언어적인 선적 깨달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가 밝혀질 것이다.
2. 유가, 도가, 불교의 언어관
유가.
언어영물론적 관점, 말이나 이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임의대로 설정하는 우연적이고 도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천지의 뜻을 담고 있는 신성하고 본질적인 것이다. 이름은 곧 천지의 뜻, 천지의 울림, 천지의 신성한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천의를 표현하는 이름이 먼저 있고, 사물은 그 이름에 따라 생겨난다. 말은 천의의 표현으로서 천의를 담고 있는 것이며, 사물은 그 말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다. 말의 원천은 천이고, 사물의 원천은 말이다. 그러므로 '하늘 -> 이름(명) -> 사물(사)'이라는 구도가 성립한다. 정명사상 : 사물과 관계하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말, 즉 이름을 분명히 바로 잡고 바로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만 비로소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다. 공자의 정명사상.
도가.
말을 천의를 담고 있는 영물적인 신성한 존재로 보지 않고 도를 표현하는 수단, 그것도 충분히 못한 수단으로 보는 관점. 도구적 언어관.
언부진의: 말은 뜻을 다 나타내지 못하는 불충분한 수단일 뿐.
주역. 글은 말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말은 뜻(도)을 다 드러내지 못한다. 도는 말을 초월한 것이다.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 지(지리할 때 지)는 천을 따르고 천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노자에게 있어 도는 자연의 도이다. 자연의 말 없음이 도의 말 없음을 말해준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잡히지 않아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도다.
불교의 언어관.
언어 또는 이름을 신성한 영물적 존재로 보지 않고 무엇인가를 지시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보는 도구적 언어관에는 언어에 상응하는 실재가 언어독립적 실재로서 전제되어 있다. 언어는 비록 불충분할지언정 그 언어 너머의 실재를 지시하고 지칭하며, 따라서 실제적인 이름, 즉 실명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우리의 언어에 상응하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며, 따라서 우리의 언어는 그런 실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명론의 입장을 취한다. 우리 자신의 개념적 구성물일 뿐이다. 실재하는 것은 찰나 생멸적인 인연화합의 현상일 뿐이지, 그러한 현상 너머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존속하는 자성 또는 본질은 없다. 일체는 무자성이므로 공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세계는 이러한 공에 바탕을 두고 우리 자신의 개념적 분별에 따라 구성된 현상, 가유일 뿐이다. 나아가 이름에 상응하는 실재가 없으므로 이름 또한 가명일 뿐이다. 즉 가설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시설된 허구적 이름, 가명이다. 그러므로 "가설적으로 아왕 법을 시설한다"고 말한다.
불교에서의 가명과 가유의 주장은 영물적 존재로서의 이름에의 집착과 이름이 지시하는 바라고 여겨지는 객관적 실재(도)에의 집착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가에서 처럼 로고스, 말, 개념 안에 신성한 본질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함도 잘못이지만, 도가에서처럼 그 말 너머에 말이 나타내고자 하는 객관적 이치나 무명의 도가 말에 상응하는 실체로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말에 상응하는 객관적 실재가 따로 있지 않기에 가유이며, 가유이기에 그것을 칭하는 이름 또한 가명이다. 그러므로 공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선사는 "법을 구하는 자는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는 것이다"
3. 불교의 가유, 가명론
선적인 깨달음을 말로 다할 수 없는 도의 깨달음, 우주 이치이 신비적 체험인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선을 중국화된 불교, 노장화된 불교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른 이해일까?
노장의 무명(없을 무 이름 명)의 도와 불교의 공이 과연 같은 것이겠는가? 노장이나 불교나 둘 다 궁극적으로 언어를 버릴 것을 말한다. 언어에 매이지 말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무슨 까닭에 말을 버려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말 너머에 말이 다하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말 너머에 아무것도 없기에 그 말이 공허하기 때문인가?말을 그물로 비유하며 그물을 버려야 한다면, 그물 아닌 고기를 손에 넣기 위해 그물을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그물로써 잡아야 할 것이 따로 있지 않기에 그물을 버려야 하는 것인가? 그물에 매임, 말에 매임이 망념인가? 아니면 그물 너머에 고기가 있다는 생각, 말 너머에 그것이 지시하는 실재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망념인가?
우리는 일상적으로 말 너머에 실재가 있다고 생각하고 말은 그것을 지칭하므로 실명이지 가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은 달을 지시하는 손가락과 같고, 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다. 만일 달이 없다면 손가락은 왜 치켜세우고, 고기가 엇다면 그물은 왜 펼치겠는가?
그런데 불교는 가유 가명을 말한다. 언명에 상응하는 궁극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의 말은 모두 말 밖의 궁극적 지시체를 가지지 않는 가명이라는 것이다. 손가락이 달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라면, 달은 별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고 별은 해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고.... 이렇게 해서 무한히 나아간다. 그물이 고기를 낚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라면, 고기는 돈을 낚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고, 돈은 사람을 낚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고....우리가 말 밖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 그것 역시 또 하나의 말일 뿐이고 우리가 언어 밖의 실재라고 생각한 것,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언어일 뿐이다. ..... 언전(말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길, 말에 매이지 않는 바른 길은 우리가 말로 악한 뜻 역시 또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다. 임제가 말하는 '살불살조'
그러나 우리는 왜 언전(말의 그물)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인가? 불교는 왜 우리가 경험한다고 느끼는 언어 밖의 실재가 참된 실재가 아니고, 또 다른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가? 우리는 언어적 개념적 분별에 앞서 느낌과 의지의 차원에서 실재를 접하고 있지 않는가?
불교가 가유와 가명을 주장하는 것은 의식적 차원에서의 언어적 분별을 너머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접촉하고 포착한다고 믿는 그런 우리의 느낌이나 무의식의 차원마저도 이미 그 자체로 우리 자신의 의식의 침전물로 가려져 있는 것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오관의 감각작용을 멈추고, 의식적 분별작용도 멈춘 상태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무의식의 흐름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 우주질서와의 합일이라는 무분별적 지혜를 담고 있는 신비적 체험의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의 의식의 역사, 우리 자신의 과거, 우리의 자신의 업에 의해 물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 자신의 분별적 의식 작용의 침전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분별적 의식으로부터 무엇이 어떻게 무의식에 침전되는가? 불교는 의식 활동으로부터 무의식에 침전되는 것을 종자라고 하고, 그러한 종자가 침전되는 방식을 훈습이라고 한다. 우리의 의식적 또는 의지적 분별 작용은 우리의 무의식적 마음 안에 종자를 훈습한다. 종자는 일종의 이데아, 관념이고 개념이며 언어이다. 그래서 종자를 총칭하여 명언종자라고 말한다. 무의식에 심겨지는 종자란 곧 의식의 흔적, 말의 힘이 남기는 여운이다. 우리의 언어분별적 차원의 의식작용은 그 언어적 분별구조를 무의식에 남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의식 역시 언어적 분별력을 따라 구조지워진다. 언어적 분별력은 단지 우리의 표면적 의식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에서까지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무의식적 마음 안의 분별종자에 따라 세계를 경험한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우리 자신의 의식적 분별력에 의해 물든 분별적 세계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의도적 의식적으로 언어적 분별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분별적인 개념의 틀, 언어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물 바깥에 그물로 잡을 것이 따로 있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그물을 펼치는가? 우리 스스로가 그물을 갖고 고기를 만드는 것이다. 말 너머에 실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말로써 실재를 시설하고 있는 것이다. 말의 그물이 엮어 내는 우리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각자의 마음의 세계이다. 우리 각자의 마음이 구성해내는 가유의 세계인 것이다.
4. 사적 언어와 마음의 문제
불교적 언어관은 일견 우리의 언어 사용에 있어 그 언어로써 지칭되어질 내적이고 사적인 경험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사적 언어란 불가능하고,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사용되는 방식에 따라 규정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사용론적 관점과 유사한 것 처럼 보인다.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과 방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용론적 언어관. 이는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이 외적이고 그 사용의 규칙이 공적이기에, 내적이고 사적인 언어란 불가능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불가능성의 논증에 기반을 둔 것이다.
사적 언어란 내성적인 인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언어. 예를들어 고통의 의미는 내적 마음 안에 따로르는 사적인 고통의 의식이다. ...
언어적 가유 너머의 실유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논리는 곧잘 언어에 상응하는 지시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현대적 논리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말 너머 그것이 지시하는 실재가 있지 않다면, 즉 그물 너머 그것이 잡고자 하는 고기가 있지 않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고통이라는 단어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각자 마음 속의 딱정벌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들여다보는 상자 속은 비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물이 지시하는 고기, 언명이 지칭하는 법을 상정해 온 것이 우리의 고질적 집착이라는 것과 단어가 지시하는 내적이고 사적인 경험을 상정해 온 것이 우리의 잘못된 가정이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둘의 유사성은 단지 형식상의 유사성일 뿐. 왜냐하면 불교가 언어 밖의 실재로서 부정하는 것은 각자의 마음 밖의 실재인데 반해, 언어사용론자가 언어지시체로서 부정하는 것은 바로 각자의 마음 안의 딱정벌레, 내적이고 사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불교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자의 마음 속의 딱정벌레의 경험일 뿐이다.
의미는 그 언어사용의 규칙에 따라 결정되며, 규칙은 그 규칙이 지켜졌는지 아닌지가 공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는 유일한 언어는 공적언어이다.
그러나 이상의 논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앞의 느낌과 다음의 느낌이 동일하단는 것을 그 느낌의 기억 자체만으로 확립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성을 그 확실성을 느끼는 의식 자체의 자명성 또는 자증성에서 구하지 않고 그 의식 밖의 외적 기준에서 구하는 것이다. . . . . . 내적 기준이 아닌 외적 기준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그 기준 역시 그것이 우리 의식에 확실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한, 이미 내적 자증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인하는가? 그에게 직접 물어보거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 봄으로써 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가 거기 있었음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기억을 통해서일 뿐이다. 결국 어느 누군가에 있어서이든 그 기억하는 의식의 자내증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 . . 가령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 사진의 나 자신이나 그가 바로 지금의 나나 그와 동일하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하겠는가? 그것이 거짓 사진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겠는가? 사진을 찍은 사람의 확신 그리고 그렇게 보는 사람의 확신 이외에 다른 기준은 없다. 결국 확실성의 가장 근본은 확신하는 의식 그 자체의 자내증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공적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 곧 우리가 한 단어를 사용할 경우 정말로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하고 같은 것을 인식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의 상자 속의 딱정벌레만을 알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아니 그것이 우리의 인식의 상대성에 더 적합한 이해이다. 누군가는 고통이라는 단어로써 자기 자신 안의 ㄱ를 의미하고 , 누군가는 ㄴ을 의미하고 누군가는 ㄷ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 사용에 있어 일치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그 단어 아래 무엇을 이해하는가 하는 그 내용적 일치가 아니라, 단지 말의 형식적 일치일 뿐일 수도 있다.
고통의 자극은 같았지만, 고통의 외적 반응은 서로 달랐다. 이 처럼 내적 느낌의 정도를 외적으로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아프다는 말의 사용의 동일성을 넘어서서 그 각각이 느끼는 바에 있어서의 동일성 또는 상이성은 객관화하여 알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을 일으킨 외적 상황으로도 고통에서 비롯되는 외적 표현으로도 또 그 사이의 외적 두뇌반응으로도 측정될 수 없는 것이다. 외적 세계의 동일성만을 전제하고 그 세계를 아는 마음의 내적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한, 유아론은 철학적 궤변이 아니 오히려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 밖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물 밖의 고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의 딱정벌레, 내적인 마음의 세계를 굳이 주장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나? 그것은 마음 안의 딱정벌레가 바로 우리 의식의 침전물로서의 우리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의 그물로 엮어 만든 실재, 나 자신의 삶이 바로 딱정벌레의 삶인 것이다. 내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내 마음 안에서 무엇인가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게 있어 고통의 의미는 분명 내 마음속의 딱정벌레의 아픔인 것이다. 사적 경험, 딱정벌레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살, 우리 각자의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때론 고통스럽기도 하고 때론 즐겁기도 한 인연과 업으로 뭉친 그 자신의 역사, 그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만을 그것을 부정한다면 아무 것도 없다. 그야말로 공이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개념 틀에 따라 형성되는 가의 현상세계는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적 경험과 더불어 마음을 부정하는 자들은 그렇게 남겨진 공 위에다 외적인 객관세계를 구축한다. 딱정벌레의 삶은 분별적 업으로 뭉친 번뇌의 세계이다.
5. 일심에 의한 공공성 확보와 일심의 자각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가의 번뇌 세계, 그리고 그러한 가의 세계를 형성하는 내적 마음이 왜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가? 번뇌와 고통의 삶이 있는 바로 그 마음 안에서만 다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땅에 걸려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듯이, 개념적 분별로 그물을 엮는 바로 그 마음 한가운데에서만 그 그물로부터의 해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번뇌의 마음 속의 여래심. 각자의 세계를 각자의 내적이고 사적인 마음의 세계, 닥정벌레의 세계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하나의 보편적 끈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각자의 마음은 하나의 보편적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차별적 마음은 궁극적으로 일심의 표현이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통스럽다고 말할 때, 그 고통의 의미를 서로 같다고 이해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단어를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다른 사람의 상자 안에도 자신의 것과 같은 딱정벌레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 언어의 일치는 단지 말의 형식적 일치일 뿐이지 내용적 일치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내용적 일치를 상정하고 있는 한, 우리는 이미 우리들 내면의 서로 같은 동일한 보편성을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의 같은 세게를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보여진 세계가 하나라는 외적 사실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세계가 하나임을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계를 아는 우리 각각의 마음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교가 일심을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언어의 궁극적 의미, 확실성의 기준은 내적 확신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으며, 언어를 통해 파악된 세게의 동일성은 그렇게 언어를 상용하는 우리들 마음의 동일성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고통'이라는 단어로써 내용적으로도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상자 안에 동일한 딱정벌레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일심을 전제하지 않고서 유아론 내지 상대주의를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면 차별적 마음 속의 보편적 일심, 그 마음 안의 부처를 깨닫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귀기울여 듣는 딱정벌레의 소리는 언어적 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적인 깨달음의 소리가 아니다. 우리의 아픔과 기쁨, 우리의 무의식조차 이미 우리 자신의 의식적 분별에 의해 채색되고 옷 입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마음 안 어디에서 부분별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어디에서 일심을 찾을 수 있겠는가?
언어적 불별을 모두 떠나서 무분별적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 깊이에까지 잠재된 우리 자신의 엯, 우리 의식의 길고 긴 역사, 우리의 의식경험으로 인한 종자 훈습의 긴긴 역사를 거꾸로 지워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억 겁을 이어 온 우리 자신의 업을 소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과연 필요하겠는가? 번뇌를 모두 귾고 나서 열반을 얻는다는 것, 이것은 우리 인간이 바라기에는 너무 요원한 것이다. 점수.
단지 놀라운 것은 우리 마음이 수억 겁으로 이어진 우리 자신의 언어적 분별력에 의해 물들어져 잇으면서도, 그 언어적 분별을 우리 자신의 허망분별로 자각하고, 분별적 언명을 허구적 가명으로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사유를 규정하는 언어의 그물을 허망분별의 그물로서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허망분별을 허방분별로, 가명을 가명으로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허망을 벗어나고 분별을 벗어나고 가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분별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업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분별과 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돈오. 분별에 싸여 있어도 그 안에 무분별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고, 업메 묻혀 있어도 그 안에 업으로부터 자유로운 여래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의 딱정벌레가 흔적 없이 사멸해 버린 적막한 불모의 땅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저마다의 소리와 빛깔로 딱정벌레가 울어대는 그 번뇌의 마음 한 가운데에 번뇌를 직시하면서도 번뇌에 이끌리지 않는 부동의 마음이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안의 딱정벌레, 우리 마음 안의 고통과 번뇌가 결국 서로 같은 것임을 자각할 때, 그 일심의 자각을 통해 우리는 자타와 내외의 분별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불안을 불안으로 자각하는 마음, 그 마음은 이미 불안해 하는 마음이 아니다. 언전을 언전으로 자각한 마음, 그 마음은 이미 언전에 메인 마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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