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의 철학_한자경

11장.물리주의 비판2: 감각질을 떠난 세계 인식은 가능한가?

백_일홍 2018. 11. 24. 10:06

1. 무엇이 문제인가?

 

물리주의는 물리적 실체의 존재를 전제한 후, 인간의 심리적 의식현상을 인간의 물리적 두뇌의 속성 또는 기능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세계인식도 그 인식자의 두뇌활동의 산물로 이해될 경우, 그렇게 인식된 세계(뇌를 포함한 물리세계)는 더 이상 그 인식자의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실체로 간주되기 힘들다. 결국 심리현상의 기반으로 물리적 실체를 전제하지만, 그 자체의 인식 이해에 따라 볼 때 객관적인 물리적 실체가 정당하게 주장될 수 없기에 즉 자신의 전제가 부정되기에 자기 논파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계의 인식과 인식된 세계 그리고 세계 자체를 서로 별개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일까?

(1) 우리의 세계 인식은 주관적이지만, 그렇게 인식된 세계는 객관적이라고 말할 것인가? (주. 인식구조가 인간 류 공통의 구조라고 전제된다면, 그 때 주관성은 곧 인간 류 전체에 대해 타당한 상호주관성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주관적 인식을 가지고 객관적 세계인식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2) 우리의 주관적 세계인식에 따라 인식된 세계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인식된 세계 배후의 세계 자체가 객관적이라는 말인가? -> 우리에 의해 인식되지도 않는 객관적 세계 자체를 무슨 근거에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설정한단 말인가?

(3) 우리에 의해 인식된 세계가 객관적 세계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우리의 세계 인식도 객관적이라고 말할 것인가?

 

물리주의자들이 세 번째 관점을 택하리라 추측된다. 무슨 근거에서 우리의 인식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객관적 인식, 객관적 의식상태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인식에 있어서의 주관성, 즉 주관적 의식을 배제하려 한다. 그 주관적 의식이란 다름 아닌 주관적 감각질의 의식, 곧 현상적 의식인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의식상태를 감각질을 포함한 질적 의식상태(현상적 의식)과 감각질을 포함하지 않는 명제적 의식상태(지향적 의식상태) 둘로 구분한 후, 전자가 배제된 후자의 의식방식을 통해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세계인식은 감각질의 의식처럼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 세계 인식(느낌이 아닌 인식!)은 명제태도 또는 지향적 의상상태에 속하며, 그것은 질적 의식과는 구분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두 영역으로 구분하며, 지향적 의식 영역에서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곧 마음을 두 영역으로 구분하고, 그 마음이 의식하는 세계를 다시 두 영역으로 구분하면서 그 각각을 서로 별개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객관적 세계인식: 지향적 의식 -> 물리세계(객관적 세계 자체)

주관적 체험 :현상적 의식 -> 심리세계(종교, 예술의 세계)

 

마음이 세계로 나아갈 때 지향적 의식의 길을 택하면, 현상적 의식을 배제하고서도 충분히 객관적인 물리 세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 처럼 생각하게 된다. 마치 우리가 주관적 감각질과 무관하게 객관적 세계에 대해 객관적 인식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물리 세계에 접근하는 길에 감각이 배제된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용적으로 현상적 의식(주관성)에 기반하지 않은 지향적 의식(객관성)이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눈코입귀피부를 통해 주어지는 색, 모양, 맛, 냄새, 느낌 이외에 외부 사물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겠는가? 객관 세계의 인식에 있어 감각질의 현상적 의식을 배제하고 세계의 내용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게 인식된 빨간 색, 크기, 모양, 향기, 맛 등을 제외하고서 그런 것들과 구분되는 '빨간 사과 자체'라는 것을 물리 세계에서 대상적으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리적 실체로 간주되는 사물을 인식할 때 우리가 실제로 인식하는 것은 그 사물의 속성들일 뿐이다. 직접적으로 감각질로서 주어지는 것이 사물의 속성인 것이다. 결국 주관적인 빨간 색 지각 또는 지각된 빨간 색과 구분되는 객관적인 "발간 사과 자체"란 공허한 개념일 뿐이다.

 

그것이 감각질 너머의 어떤 것, 현상적 의식 너머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감각질로서 주어지는 속성들을 담지하는 것으로서의 실체로 이해되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이 때 실체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는 특정 감각질로 주어지지 않으면서, 대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감각질들을 정리하고 연결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 가장 주관적인 개념일 뿐이다.

 

객관적인 지향적 의식이라고 여겨지는 세계 인식에 있어서도 그 인식의 기반에는 현상적 의식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점에서 우리 의식은 내용적으로 결코 현상적 의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 -----------------------------------------------------------------------> 세계

현상적 의식(내용) + 지향적 의식(형식적 구조)

 

현상적 의식이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렇게 인식된 세계 역시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 물론 이때 주관성은 세계인식에서 보편성이 확보되는 그 만큼의 보편성을 갖춘 주관성인 것이다. 이는 류적 상호주관성이다.

 

물리적 실체, 빨간 사과 자체,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세계란 그 어디에도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3.현상적 의식의 주관성 및 상호주관성

 

객관성의 신화.

우리의 인식을 절대화하는 것, 결국 인간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일 뿐.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세계 자체'라는 생각은 인간의 오만일 뿐이다. 물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물리적 실체로 이루어진 물리 세계는 오직 인간에게만 그렇게 있는 세계일 뿐이다.

 

실제 논해져야 할 문제거리는 사실 심리적인 것의 실재성이 아니라 오히려 물리적 존재의 실재성인 것이다. 세계의 인식이 주관적인 만큼, 인식된 세계 역시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이글,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네이글은 우리가 인식한 세계만을 세계 전체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인간 인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2)의 관점을 취한 것.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주관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세계 자체가 바로 주관적인 것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고, 그러한 주관적 인식의 근거에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해도 객관적인 세계 자체가 존재해야만 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의미있게 '있다',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식된 세계에 국한된 것일 뿐이다.

 

심리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는 우리에 의해 그렇게 인식된 세계일 뿐이다. 이 점에서 세계의 인식도 인식된 세계도 모두 우리 인간 류의 주관적 인식조건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 현상 세계 너머에 객관적 '세계 자체'가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모두 무의미한 말일 뿐이다. 더구나 그 세계 자체가 '물리적 세계'의 '물리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무의미할 뿐이다.

 

단 여기서 세계의 인식 또는 인식된 세계의 주관성은 인간 개인의 사적 주관성이 아니라, 인간 류 전체에 타당한 보편적 상호주관성을 뜻한다. 따라서 유아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물론적으로 인간의 의식을 개체적 두뇌의 산물로만 본다면 그 개채성을 넘어설 수 없는 유아론에 빠지게 되겠지만 인식된 세계가 가지는 보편성을 (객관적 물질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주관정신의 보편성에서 끌어내는 유심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 개인의 의식은 이미 현상세계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상호주관성을 그 핵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개체 의식 안에 깃든 그 보편적 상호주관성을 '초월적 자아'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개체를 벗어나 유령처럼 떠다니는 정체불명의 무엇이 아니라 개체 안에 작용하는 보편정신이다. 개체인 내가 다른 개체인 너를 공감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공통기반인 것이다.

 

4.자아의 자기동일성

 

인간 개체 안의 보편정신을 '초월적 자아'라고 칭하면서 그것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려는 것에 대해 김선희는 매우 비판적이다. 보편적 정신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적 몸'이 한 인격을 다른 인격과 구분짓는 '인격의 구성요소'이며, 인간을 '도덕책임 주체'이게 하는 것이기에, '인격으로서의 인간 존재론을 위해서 진정 중요한 것"은 보편적 정신이 아니라 바로 개체적 몸이라는 것이다.

 

그는 왜 개체적 몸을 강조하는가? '도덕적 책임 주체로서의 인격'의 문제는 '신분확인'의 문제와 연결되는데, 인격의 신분확인은 결국 개체적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몸이 같은 몸이면, 그 몸이 한 모든 행위를 그 몸이 책임져야 하는가? 정신착란 혹은 최면상태에서 저지른 범죄.

 

그럼에도 불구히고 김선화는 시공적으로 지속성을 갖는 개별적인 몸을 신분확인의 기준이며 그 점에서 인격의 구성요소라고 주장한다. 개별적 몸의 시공간적 지속성이란 인간 뿐 아니라 모든 개체적 사물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수적 동일성이다. 컵.

 

어떻게 한 인간의 자기 동일성 문제가 수적 동일성의 문제로 해결 될 수 있는가? 컵과 달리 인간은 자기의식과 자기동일성 의식이 있다.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격의 문제를 인격 확인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 김선희의 문제해결 방식. 일인칭적 주관성의 의식을 삼인칭적 객관성의 사실로 설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현대적 사유경향 즉 물리주의적 사유방식을 반영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의식은 그것 자체로 자명한 것이다. 나는 나의 사랑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