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물리주의 비판1: 무엇이 존재하는가?
1.철학적 수수께끼
철학을 계속했음에도 내가 답하지 못하는 철학적 물음들, 내가 진정으로 알고자 하지만 그 답을 알지 못하는 물음들은 과연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으면, 이성적 사유에 앞서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천체물리학에 의해 수백년 우주역사가 밝혀지고, 유전공학에 의해 DNA 암호해독이 완료된다고 해도, 그래도 인생과 일체 존재가 내게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을 것 같은 그런 서글픈 감정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무명을 걷어 내기 위해 인간이 치러야 할 또 다른 몫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마음의 고통이 커지면 사람들은 그 아픔을 치유하기보다는 그것을 잊으려고 한다. "수수께끼가 없다"는 말은 철학적 영혼이 느끼는 아픔의 절정에서 나온 한탄의 말일 것이다. 물어도 답할 수 없는 물음, 차라리 묻지 말자.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 차라리 부르지 말자. 차라리 우리의 물음을 잊어보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당분간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과연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분명히 해보자. 나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자 철학을 하고 있는가? 아직 무엇을 모르고 있기에 철학을 계속하는 것인가? 우선 분명히 해야할 것은 우리가 과연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하는 것이리라.
나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나의 영혼이 어떤 식으로 나의 신체와 결부되어 있는 것인지...정말로 알고 싶다. 나의 신체에 제한된 경험적 자아가 아닌 그런 제한성을 넘어선 보편정신으로서의 초월적 자아, 또는 우주를 포괄하는 무한으로서의 일심, 그것을 단지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포착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는 한, 나는 내가 나를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2. 물리주의의 자기모순성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은 현대철학자의 눈에는 무식한 망상으로 여겨질 것이다. 현대의 과학적 사유에 따르면 영혼이라는 개념자체가 잘못 설정된 개념이다. 그 과학적 사유에 따르면 존재하는 일체는 모두 물리적 존재이고, 우리가 그 물리적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 역시 물리적 존재이기에 특히 우리의 물리적 뇌가 고도로 진화 발달된 영특한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오로지 물리적인 것만이 존재하며 현상적 사건의 발생과 변화는 모두 물리적 인과법칙에 따라 성립하고 따라서 물리적 인과법칙에 의해 설명 가능하다는 것의 기본전제이다. 그 관점에 따르면 그와 같은 물리적 뇌의 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의식현상에 미혹해서 그 의식현상의 근거로서 마음이나 영혼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편견의 잔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의 상식, 그 유물론적 설명을 대할 때마다 나는 오리려 그 사유의 단순함에 놀란다.과학이라는 그 치밀하고 복잡한 이론 아래 깔려 있는 그 단순한 논리가 내겐 기막힌 역설로 보이는 것이다.
예. 빨간 색의 감각 혹은 의식은,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빨간 사물이 물리적 대상으로서 눈, 두뇌신경을 물리화학적으로 자극하여 그 결과로 발생한 부수적 현상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단순한 논리. 그 단순함이 내겐 돼지를 연상시킨다. 남을 혜아리면서 막상 헤아리는 자기 자신은 빼놓고 세는 돼지 말이다.
물리주의: 오로지 물리적인 것만이 실재하고 심리현상은 그러한 물리적 두뇌활동이 산출하는 부수적 현상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유물론적 관점. 인간의 일체의 의식활동을 모두 물리적 두뇌활동이 야기하는 부수적 결과물이라고 가정함.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렇게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간주된 물리적 사물은 과연 어떻게 알려진 것인가?
우리 인간 모두가 감지하고 있는 이 물리적 세계는 과학이 밝혀주는 바로 그 방식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것. 그러나 일체의 과학적 진리 역시 과학자의 두뇌를 거쳐 확인된 것이 아닌가?
문제는 물리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단지 두뇌활동의 부수현상에 지나지 않는 그런 의식현상만이 실재로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세계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물리주의가 존재의 실재성으로부터 배제하고자 하는 의식 또는 마음현상만이 사실은 우리가 실재 존재하는 것으로서 확인할 수 있는 즉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라는 것.
두뇌생리학자들이 두뇌를 3인칭적으로 분해 관찰하여 인식할 때 그렇게 알려진 두뇌는 바로 그렇게 관찰 분석하는 두뇌생리학자 자신의 두뇌를 통해서 알려진 두뇌일 뿐이다.
확실한 것은 심리적 의식세계이고 두뇌를 포함한 물리적 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심리활동의 결과물이 되는 것.
물리주의가 답이 될 수 없다는 것, 두되가 나의 정체성을 밝혀줄 수 없다는 것. 인간을 진화된 동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부터 철학적 물음을 던질 수 있기 위해서 나는 어느 한 때 철저한 유물론자였는지도 모른다.
3. 초월자아의 수수께끼, 세계를 보는 눈은 자신을 볼 수 있는가?
물리적 우주 전체를 떠올리는 의식 자체, 그것을 나의 두뇌에 귀속하는 두뇌산물로서의 이차적 부수현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두뇌를 활동시키는 궁극적 활동주체로 간주한다면, 그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이렇게 해서 나는 나를 이원화하게 된다. 한편으로 내게 의식된 우주의 일부분으로서의 나. 즉 나의 두뇌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나. 그러한 나의 두뇌의 재한성을 넘어서서 우주전체를 그 안에 담고 있는 궁극적 사유의 주체로서의 나를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 두개의 나.
내게 일차적으로 확실하게 주어지는 것이 전체를 포괄하는 의식세계이고, 그 안에서 비로소 주객, 심리물리, 나와 너, 나와 세계가 구획지어지는 것이라면 그렇게 우주의 일부분으르서 구획지어진 나와 그러한 구획을 넘어서서 전체를 포괄하는 나는 분명 존재론적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많은 형이상학자들이 취한 길이다. 전자를 경험적 자아로 후자를 초월적 자아로 불렀는데 문제는 항상 초월적 자아였다. 그것은 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세계는 바로 이 초월적 자아에 의해서 형성되는 세계이다. "세계는 나의 세계다"
그것이 바로 나인데 그 나를 빼고 어떻게 나의 세계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동서 형이상학의 핵심은 언제나 초월적 자아의 해명에 놓여있음. 데카르트가 확실한 존재로서 직관한 '사유하는 자아', 칸트의 초월적 자아, 헤겔의 절대정신, 후설의 초월적 자아, 이것들은 모두 주객대립 속의 현상적 자아와는 구분되는 주객통합의 우주포괄적 정신을 말한다. 유가의 천지지심, 우주전체를 그 안에 담고 있는 무한과 절대의 일심. 불생불멸의 진여가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이해가 그냥 개넘적이고 논리적 이해에 그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지 못한다. 자아를 이해함에 있어 그 끝이 어디여야 하는지를. 나의 물음을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개념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모른다는 이 느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과연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사유가 아닌 직관으로서 나는 나를 보고 싶은 것이다.
불교는 이미 우리에게 초월적 자아로서의 자신에 대한 신령스런 앎이 있다고 말한다.
성자신해.
그렇다면 왜 나의 의식이 자유자재로 나의 신체적 제한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모두 스스로 구분지어 놓은 경계를 고수하며, 그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이런 물음들을 어디에서 부터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인지를 정말 알지 못한다.
4.잘못된 풀이, 초월자아의 현상학 또는 초월자아의 배제
초월적 자아를 논하는 많은 형이상학자들은 초월이라는 개념이 자아와 연결될 때,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면서 동시에 고통이고 그것이 얼마나 큰 희망이면서 동시에 절망인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나를 서글프게 하는 철학자들.
초월자아를 말하되 단지 우리의 세계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인식론적 또는 논리적 상정이라고 주장하는 이.
초월적 자아를 말하되 그것을 자아와 우주를 포괄하는 존재론적 근거로 이해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실현시켜야 할 이론적 또는 실천적 요청이라고 주장하는 이.
초월저 자아를 언급하되 그것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달 불가능한 신의 다른 이름이라고 간주하는 이.
그들은 모두 개념적으로는 이해되는 그 초월적 자아가 바로 자기 자신으로 직관되지 않기에, 자아로서 확인되어일 할 그 자리가 언제나 비어있기에 그 기다림에 지쳐 체념한 사람들일 것.
그러다 그 보다 더 서글픔을 내게 안겨 주는 철학자는 사실 더 이상 철학하지 않고 더 이상 사유하지 않을 때, 바로 그 때 우리가 본래적 자아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식의 철학자들이다.
상식에 따라 말한다면, 우리의 경험은 물리적 세계와 심리적 자아의 상호작용관계로 성립한다. 물리적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심리적 자아는 물리적 환경에 의해 자극받고 반응하면서 그 자체의 생존 메카니즘을 형성한 이차적 존재이다.
상식에 따른면 물리적 세계는 하나이고 심리적 정신세계는 각자마다 다르다. 그런 상이한 영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경험대상인 세계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경험의 공공성은 신체적 물리적 차원에서 확보되며, 경험의 상대적 변이는 정신적 추상적 차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
따라서 상식의 논리에 따르면 물리적 세계의 정신독립적 자체 존재를 인정하는 실재론자는 세계 경험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보다 잘 설명할 수 있으며, 반대로 그것을 부정하는 반실재론자는 상대주의나 회의론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식에 기반한 체험주의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심각하게 제기되는 철학적 물음 자체의 포기임.
물리주의가 맞다면 일체의 경험은 원칙적으로 물리적 인과법칙에 따라 설명 가능한 것이어야 할 것. 그런데 그 물리주의의 함정은 그렇게 실재한다고 생각된 물리적인 세계가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의 의식경험을 떠나서 있지 않다는 것. 물리적 차원에서 인식된 세계의 단일성이 그렇게 세계를 인식하는 정신의 단일성을 전제함이 없이 어떻게 확보할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3인칭적으로 접근 가능한 객관적인 물리적 세계와 직접적으로 1인칭적으로 접근 가능한 주관적 의식세계와의 관계에서 최종적 근거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보이는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정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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