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의 철학_한자경

3부-13장.유식무경의 철학적 의미

백_일홍 2018. 11. 24. 13:59

1.식(인식)과 경(존재)의 물음

 

실제 외경은 없다 오직 내식만이 존재한다.

식의 대상은 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은 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식 자체가 발현하여 나타난 결과다. 식이 있으므로 식소변으로 경이 있다.

 

우리의 일상적 사유. 식이 성립하기 위해 먼저 식 독립적인 경이 식에 앞서 존재해야만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이란 어떤 경인가?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현상세계.경1

과학적으로 밝혀진 현상의 물질적 기본요소.경2

및 자연법칙.경3

절대적 가치세계(도덕가치 천도 신 진여).경4

 

이 모두가 중생의 식 내재적 존재 이상이 아니다. 법공.

 

1) 색법(경2)의 개관실유성 부정

 

형태가 그 현상을 보는 중생심 외부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그 형태를 이루는 요소로서의 점 역시 그 점을 보는 중생심 외부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요소주의자 비판.

요소를 종합하여 현상을 이루는 활동은 분명 우리 마음의 활동이다. 현상을 분석하여 요소를 찾아내는 활동은 무슨 활동인가? 그것은 우리 마음의 활동이 아닌가?

 

2)불상응행법(경3)의 객관실유성 부정

 

너가 운율을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내 마음 안에서 운울이 형성되지 않으면 안됨. 내가 들은 운율은 나 스스로 작곡한 운율인 셈. 내가 본 현상은 내가 창출 한 것이며, 나는 오직 내가 창출한 현상만을 경험할 수 있다.

 

나의 마음 안에는 현상의 물질적 기본윈리 뿐만 아니라 헌상의 기본원리 현상 구성원리도 내재해 있다.

 

3) 무위법(경4)의 객관실유성의 부정

 

 

4.식의 전변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나의 마음이 만든 세계이다.

현상세게를 창출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활동을 의식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구성이 완료되어 나타나는 현상세계일 뿐.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활동을 모두 다 의식하지는 못한다는 사실. 우리 자신의 마음 활동이기는 하되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그런 마음의 활동이 있다. 우리의 의식 그 자체가 제한적인 것 극히 표피적인 것이기 때문. 의식보다 더 깊은 차원의 마음 활동에 대해서는 의식이 미치지 못함. 활동주체는 아뢰야식. 그 식의 활동을 식전변.

 

야뢰야식의 식전변활동이란 아뢰야식 식 자체의 이원화. 견분과 상분. 주객 이원화.

 

단일한 존재근거가 왜 둘로 분화되는가?

형이상학 일반의 기본물음.

무한자가 자신의 존재를 비존재가 아닌 존재로 확인하기 위해.

 

아뢰야식의 헌상구성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 이원화 활동에 해당함. 아뢰아식 안에는 현상을 구성하는 현상의 내용적 기본 요소가 내재해 있는데 이를 종자라고 한다.

 

시간공간상 제한된 상대적 유한자들이 발생. 유근신, 기세간, 다시 그것들을 바라보는 의식활동. 유근신과 기세간이 상분, 후자가 곧 그에 대한 견분이다.

 

무한한 유일자의 자기 이원화 활동에 대해 명료한 의식은 우리의 일상적 차원의 의식에게는 가리워져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비로소 의식하게 되는 것은 그 활동을 통해 이미 이원화되고 제한된 활동의 결과물이기 때문.

 

이원화 활동자체는 무한하기 때문에 활동성 자체로 포착되지 않아.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무지 근본 무명이다. 아집과 법집.

 

대상의식, 의는 대상을 의식하는 그 순간 그처럼 대상을 의식하는 자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어. 말나식. 말나식이 견분과 상분을 각기 독립적인 실체인 아와 법으로 간주, 법집과 아집을 일으킴.

 

고통의 원인.

자기 자신에 대한 무명에서부터 일체의 집착이 생겨난다고 본다. 일체의 경이 식을 떠난 독립적 경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일상적으로 실체로서 집착하는 아와 법이 실은 우리자신의 마음의 변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유식의 도리를 알지 못함으로써 실아가 존재한다는 아집, 마음 바깥에 법이 실재한다는 법집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집착으로부터 고통이 생겨난다. 무명으로부터 집착이 집착으로부터 고통이 야기되는 것이다.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할수 있는 유일한 궁극적 길.

유식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자아 자신에 대한 밝음의 성취이다. ... 유식은 다른 일반 종교와 마찬가지로 중생 구제를 지향하면서도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전능의 구제자나 신 또는 그런 신을 향한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유식은 다른 일반 도덕과 마찬가지로 중생으로 하여금 사욕이나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룰 것을 권장하지만, 중생으로 하여금 선을 이루게 하기 위해 절대적 도덕의 법칙이나 천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궁극적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알게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무명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식은 인생의 모든 고통이 바로 집착에서 오며, 집착은 무명에서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명을 벗어 자신의 일심의 크기를 자각하는 것, 무한과 절대의 관점에서 유한과 상대를 넘어서는 것,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유식이 지향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