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존재론의 제유형
---------------------------------------- 현상: 정보
o o 실체::근거
자아(심리적 실체) 세계(물리적 실체)
관점1:실체이원론
이원론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불안정한 것이다. 서로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들이 서로 관계 맺을 수 있겠는가? 서로 관계 맺는다는 것은 결국 궁극적으로 실체가 하나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데카르트적 실체이원론 이후 서양철학사는 끊임없이 그 궁국적 하나를 추구하면서 그로부터 일체를 설명하고자 노력해 왔다. 신(스피노자), 개체 영혼(라이프니치), 의식일반(칸트), 자연(세링), 절대정신(해켈), 의지(니체), 초월적 자아(후설), 몸(메를로퐁티) 등 다양한 이름 아래 논구되었다.
이러한 실체일원론에서는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실체는 하나이며, 나머지 하나는 그 실체로부터 산출되는 정보의 산물로 간주된다.
. 유아론 : 심리적 자아만을 실제로 간주. 물질세계는 자아에 의해 자각된 결과물로 간주됨.
. 유물론: 물질적 세계만을 실체로 간주. 자아의식은 물질에 기반한 부수적 인식현상으로 간주됨.
물리주의적 관점의 현대 심리철학:
물리주의는 인과적 폐쇄성을 지닌 물리적 실체만을 궁극적 실체로 인정하고, 마음은 물리계에 속하는 뇌의 속성 또는 기능으로 설명하는 유물론적 관점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처럼 마음에서 실체성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되는 중요 개념이 바로 정보이다. 즉 마음이란 정보처리능력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정보처리기관인 뇌의 속성이나 기능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심리적 자아를 실체화하지 않고 정보를 통해 설명하는 것은 불교 유식도 마찬가지이다. 자아와 세계, 근과 경의 관계 맺음에서 발생하는 식의 내용이 곧 정보인데, 유식은 이를 종자라고 부른다. 종자는 식이 낳은 것이며, 또 식을 낳는 것으로서 식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정보를 갖는 것은 자아이지만 그 자아란 곧 종자들의 흐름으로서 다시 종자를 통해 설명되므로 실체화를 벗어나게 된다.
물리적 세계 역시 종자의 활동 결과로 설명된다. 유물론에서 물리적 실체로 간주되는 우리의 몸과 물리세계는 유식에서 유근신과 기세간으로 불리는데, 이 유근신과 기세간이 각기 불공종자와 공종자의 변현 결과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식은 자아도 세계도 실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정보를 가지는 인식주관도 정보에 의해 알려지는 인식객관도 모두 정보 즉 종자에 의거한 현상으로서, 실유적 실체가 아닌 가유적 현상으로만 인정된다.
o 자아 o 세계
----------------------------------------------- 식(종자)
관점4.유심론(유식)
2.유식에서 식과 종자
전오식. 아직 주와 객, 안과 밖의 분별이 행해지지 않은 채 감각내용만을 의식하는 상태이다.
제6의식 : 전오식의 감각내용이 주객, 안밖의 분별에 따라 객관대상의 속성으로 종합정리되데, 이 인식작용을 말함. 제6의식에 있어 인식되는 대상의 동일성은 찰나마다 주어지는 감각내용의 실질적 상이성을 뛰어넘어 그것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동일성, 따라서 감각내용과는 다른 차원에서 성립하는 개념적 동일성일 뿐이다. 의와 법경
그런 분별과 집착은 의식차원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의식작용이 일시 멈춘 상태(깊은 잠, 기절상태)에서도 여전히 유지된다. 동일한 자아, 동일한 하나의 세계라는 생각이 존속하는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분별과 집착은 의식보다 더 심층의 식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볍경을 인식하는 제6의식은 대상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상의식에는 그렇게 대상을 인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다. 제6의식의 근인 '의'의 자기의식을 말나식이라고 한다. 제7말나식은 대상을 인식하는 의가 가지는 자기의식이면서 동시에 의가 일으키는 온갖 느낌과 감정, 욕망과 의지 등을 다 포괄하는 식이다. 동일한 자아와 객관적 세계에 대한 근원적 집착은 바로 이 말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제6의식과 제7말나식보다 더 심층에서 작용하는 근본식을 발견함으로써,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이 집착하는 자아와 세계를 바로 그 심층 식의 작용결과로 설명한다. 이 심층의 식이 제8아뢰야식이다.
나의 의식작용(제6의식)인 생각이나 의지작용(제7말나식)인 뜻은 그냥 한 순간 떠 올랐다가 가라앉을 수는 있지만 그렇게 떠오른 것이 떠오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결과도 갖지 않는 것일 수는 없다. 결과를 낳기까지 생각이나 뜻이 남겨지고 심겨지는 곳, 종자들이 그 안에서 숨쉬며 살아 있다가 드디어 인연이 되면 현현하게 되는 곳 그 식을 제8아뢰야식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이 곧 종자의 흐름이다.
견분과 상분으로 현행화.
우리가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이 실은 아뢰야식의 견분히고, 물리세계라고 집착하는 것이 실은 아뢰야식의 상분에 지나지 않는다.
3.심리적 자아의 해명:아공
내가 음식을 먹고 있다. 내 몸은 이전까지 내가 먹은 음식의 결과이다.
내가 생각, 느낌 , 의지를 갖고 있다. 지금의 생각, 느낌, 의지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 이전 순간까지의 느낌이나 생각들이다. 한 느낌이 그 다음 느낌을 낳고, 그것이 다시 어떤 생각을 일으키며,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낳고, 그 다른 생각이 또 다른 의지를 낳고.. 연기설.그 안에 이것이 바로 나라고 할만한 고유한 단일한 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공. 사유주체나 의식주체란 이전 사유나 이전 의식 또는 이전 욕망들의 집적물, 즉 그것들의 흔적이 일으키는 효과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바로 지나간 의식과 말나식의 작용이 남겨 좋은 흔적들, 종자들이 일으키는 식인 것이다.
이처럼 입력된 정보, 훈습된 종자들의 작용에 의해 자아 의식이 발생한다. 종자 현행의 결과로서 아외야식의 견분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인 말나식이 바로 그것을 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의식 말나식의 활동으로 집적된 종자들로부터 독립적인 자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종자들로부터 자아의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4.물리적 세계의 해명: 법공
유식에 있어 물리적 세계는 색법의 세계로서 전오식의 기관을 형성한다고 여겨지는 근으로서의 우리 신체와 그 전호식의 객관으로 간주되는 경으로서의 세계가 된다. 유식에서는 근과 경 둘 다를 식의 전변이라고 주장한다. 유식은 인간 신체를 근을 지닌 몸이라는 의미에서 유근신이라고 한다. 색 등의 상이란 색성향미촉의 오경으로서 전오식의 소연경이며, 이는 곧 물리적 대상세계를 뜻한다. 유식은 이 대상세계를 그에 의지하여 사는 인간 신체를 그릇처럼 담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기세간이라고 한다.
1) 기세간
물리적 대상세계로서의 기세간을 식의 변현이라고 간주하는 근거는? 물리세계는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데, 그 감각의 대상에 대해 그것을 인식하는 감각 자체를 사상하고 객관실유성을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색의 물리적 모습으로 현현하는 이 세계를 형성하는 근거는 명언훈습의 세력, 즉 명언 종자인 것이다. 명언종자의 세력에 의해 세계가 형성될 때, 물리적 감각질만이 분산되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틀로 구조지어져 현현하게 된다. 전오식의 대상이 되는 색법의 대상세계로 현현할 종자를 현경명언종자라고 하고, 제6의식의 대상이 되는 법경으로 현현할 종자를 표의명언종자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보는 물리적 대상세계인 기세간, 즉 전오식에 의해 감각되고 제6의식에 의해 명제적 형식을으로 구조지어져 인되는 대상세계는 아뢰야식 내의 종자들의 변현 결과인 것이다.
기세간이 식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우리 인간이 인식하는 이 기세간은 우리 인간의 식에만 그런 형태로 존재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만일 다른 종류의 종자, 다른 정보보를 가진 생명체라면, 즉 그 아뢰야삭의 종자가 인간의 종자와 다르다면, 그 식에 현현하는 세계는 그 식으로부터 변현된 세계이기에 인간의 기세간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는 것이다.
2)유근신
마치 장미나무가 장미나무 종자 내의 생명력, 종자 내의 유전인자로부터 외화되니 결과이듯이 인간의 신체 역시 인간의 종자, 그 유전인자로부터 성장한 결과이다. 그런데 유전인자인 유전정보 그 자체가 물리적인 것은 아니듯이, 두뇌를 포함한 신체인 유근신은 감각대상과 같은 물리적 성격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감각의 소의근이라고 생각될 때의 근은 식을 일으키는 능력 또는 힘을 의미하지 실재 소연경처럼 외적인 감각 대상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유근신을 이루는 유전정보에 해당하는 것이 곧 전생의 의식과 말나식의 활동으로부터 아뢰야식에 심겨진 종자이다. 전생의 업에 따라 그 보를 형성할 힘(업력)을 담고 있는 종자에 의해 새 생명체가 태어나게 된다. 이 처럼 새 생명체를 형성해내는 종자를 업종자라고 한다. 유근신은 업종자로 형성된 변현결과이다.
업력(유전정보) -> 어떤 생명체 -> 그 생명체가 보는 세계도 달라진다.
5.마음내용(자아와 세계) 너머의 마음
자아와 세계는 종자의 산물, 식의 변현일 뿐이며 식에 입각하여 가로서 시설된 것이다.
유식성을 깨닫는 것은 곧 현상세계의 가성 또는 공성을 깨닫는 것으로서 아공 법공의 깨달음은 곧 그와 동시에 아집 법집이 멸하게 되는 수행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아를 포함한 현상세계 전체에 대해 그것이 종자, 정보, 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식의 변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보적 내용을 가지는 나의 현재의 의식을 그 이전 의식내용(현생 또는 전생의 종자)의 결과로 알아챈다는 것, 나의 눈앞에 전개되는 이 세계가 나의 의식내용인 정보에 따라 보여지는 나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 챈다는 것, 이것은 그 순간 나의 의식이 정보에 의해 규정되는 현상적 존재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강물의 흐름을 알 수 있기 위해 강물 바깥의 흐르지 않는 한 기준점을 의식해야만 하듯이, 일체 세계의 현상성과 유식성을 안다는 것은 그 의식이 더 이상 현상적이지 않는 어떤 것, 정보로 구성되지 않은 어떤 것을 자체 내에서 의식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처럼 현상 또는 정보 너머에서 요구되는 이 무엇을 실체적 어떤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형이상학이 성립하게 된다. 그것을 심리적 자아로 규정하면 유아론적 형이상학이, 물리적 실체로 규정하면 유물론적 형이상학이, 둘 다로 인정하면 이원론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심리적 또는 물리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그 현상의 기반을 공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다른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그러나 공은 단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공은 우리가 일상적인 현상적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자아로도 세계로도 규정되지 않는 무규정적인 것, 있다고도 없다고도 분별할 수 없는 초분별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없는 것과 같다. 수행을 통한 견자의 눈에는 더 이상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일체 현상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묘유로 무한한 작용력의 실재로, 진실한 존재로 진여로 직관된다.
공의 진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현상 너머에로 즉 의식에 주어지는 총체적 정보(종자)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러한 현상 너머로의 초월은 현상적 정보 또는 종자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일상적 의식은 현상 너머로의 초월에 실패하고 단순한 무로 빠져 들고 마는 것일까? 자아와 세계를 정보로 해체시킨 후, 그 정보 자체도 지워나갈 때 즉 현상을 형성하는 구체적인 의식내용은 정보를 모두 지워 나갈 때, 바로 그 자리가 공이 된다.
무심지심, 영지, 공관, 견성
불교는 세계나 나의 세계(나의 정보에 의해 형성되는 세계)라는 이론적 통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렇게 세계를 보는 나, 세계를 보는 눈, 그 눈을 직접 직관하고자 용맹정진하는 수행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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