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제 14구.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뒤섞이지 않고 제 모습을 이루네
인연의 조건에 따라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면 독립된 개별자로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낱낱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뒤섞여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변과의 인연관계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무상, 무아의 변화만이 삶일 수 있고 여기에서
제 모습을 이룰 수 있습니다.
(법계의 노래)
마음은 모습을 갖지 않기에
모양으로 그릴 수도 없고
새삼스럽게 비울 것도 없지만
마음으로 드러나는 순간
모습을 갖게 되어
그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나
순간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그 모습을 비우고
다시 다른 모습으로 얼굴을 만드니
마음도 마음이 아닌 것을
마음이라고 부를 뿐
앞선 모습이 사라진다는 데서 보면
사라짐으로 자신을 삼고
새 모습으로 드러난 데서 보면
일어남으로 자신을 알리지만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고
일어남과 사라짐이 함께 하면서
온갖 것으로 그렇게 있지요
곧 온갖 인연이 마음처럼 나투고 있을 뿐이니
마음을 비워야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자리가 원래 비었기에
온갖 것에서 깨달음을 나투는 것으로
깨달은 마음이라 부를 수도 없지만
온갖 것의 다름이
마음으로 하나 된 듯한 것을 할 수 없이
깨달은 마음이라 하겠지요
(해설)
한 치도 제 모습을 버리지 않고
하나하나의 시간이 그대로 십세의 전체 시간이 되면서도 하나하나는 자기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한 수간의 시간이 모든 시간을 담고 있다고 해서 뒤죽박죽된 시간이 아니라 자기 시간 그대로를 뚜렷하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한 그루의 나무라도 그것이 존재하게 된 것은 우주법계가 그 나무가 존재할 수 있는 인연 조건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우주법계가 한 그루의 나무속에 그 인연의 힘을 그대로 보내기 때문에 한 그루 나무이면서도 우주법계의 전체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무의 모습을 버리고서 우주법계의 기운을 나툰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화엄세계의 부처님을 비로자나 부처님이라고 하지만 그 부처님의 얼굴은 중생의 수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있는 시간과 공간을 여의지 않고도 온 세계에 두루 나툰다고 이야기하는 화엄의 가르침도 여기에 그 까닭이 있습니다.
나뭇잎은 나뭇잎의 모습대로 비로자나 부처님이 되어 부처님의 세계를 나투고, 나비는 나비대로 제 모습을 가지면서 비로자나 부처님입니다. 온 세계의 사물과 중생들이 한 치도 제 모습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부처와 부처로서 빛을 나투고 있으며 이 빛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처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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