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_정화

제16구.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백_일홍 2020. 1. 6. 21:25

(법성게) 제16구.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은 항상 함께하고

 

맑고 고요한 마음, 빈 마음으로

생사의 모습을 지켜볼 때,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연기관계에서의 중도실상일 뿐,

실체가 없는 생사를 보게 됩니다. 곧 생사가

여래법신이고 화엄의 세계입니다.

 

(법계의 노래)

 

생성이란 매순간 소멸의 다른 방향이니

소멸이 동반되지 않는다고 하면

무엇의 생성이 있을 수 있을까.

 

생성과 소멸은 서로가 서로를 있게 하는

하나 된 장면의 다른 방향으로

그 자체가 중도의 열반으로 있는

전체로서의 장이지요.

 

아름다운 꽃이 씨앗으로 남기 위해 꽃의 모습을 감추듯

씨앗이 스스로를 비우면서 꽃이 되듯

 

어느 것이든 그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비워내고 있는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움직임이

전체서로 하나 된 중도의 장이면서

빔(공)인 열반의 고요함이 되니

생성과 소멸, 고요함과 움직임 그 자체가

생명활동으로 하나입니다.

 

여기에서

'생사와 열반이 한 치의 틈도 없이 같다'고 한

용수 스님의 이야기를 되새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생사의 끊임없는 변화

곧 무상을 깨달아 사는 것이야말로 지혜며

모든 불만족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늙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며

중도의 빈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사는 어리석은 모습일지니

 

순간순간 투철히 깨어

삶에서 죽음을 담아내고

죽음에서 삶을 피어내는

무상한 흐름을 그대로 살 때

열반의 삶, 깨달음인 지혜의 삶을 살게 되겠지요.

 

그래서 옛 어른께서

'깨닫는 것이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 했겠지요.

 

(해설)

빈 마음으로 여실히 지켜보기

 

수행이란 행을 닦는 다는 것입니다. 행이란 습관적으로 현상을 동일한 모습으로 인식하게 하는 힘으로 이에 따라 시비선악 같은 의지가 생기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은 언제나 이 행의 요소가 동반되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이렇기 대문에 마음은 비워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빈 마음으로 사물을 여실히 보는 수행을 염처수행이라고 합니다. 모든 견해를 방하착하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 되는 그대로를 지켜보면서 삶의 진실을 아는 수행입니다.

 

태어남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중생과 사물의 삶을 여실히 지켜보면 생성과 소멸이 근본바탕입니다. 생성과 소멸을 여실히 안다는 것이 별 것 아닌 듯하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처님 시대는 삶의 이면에 삶의 기체로서 계급간의 차별을 결정하는 영원한 존재가 있다고 하는 상주론과, 인과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견해인 단멸론의 양대 가르침이 풍미하고 있던 때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전제하고 본다면 태어남과 죽음은 지금 여기서의 인과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현상적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면 인과 관계에서 삶과 죽음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꿰뚫고 존재하는 차별된 영원한 존재도 없고, 인과를 떠나 우연히 존재하는 삶과 죽음도 아닙니다. 168

 

또한 죽음이 있기에 영원한 것도 아니고 태어남이 있기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나눌 수 없는 인과관계의 동시 현사아으로 상주론과 단멸론의 사유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바른 견해라고 하며 중도라고 합니다.

 

온갖 삶이 모습은 단지 연기관계에서 생성과 소멸일 뿐입니다. 연기 관계에서 조건의 결합에 따라 생성과 소멸의 모습만 있는 것이 지금 여기의 우리이며 이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등으로 집착할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행의 집작에 따라서 생사가 불만족스러울 뿐입니다. 불만족으서운 생사의 모습은 생사의 본 모습이 아니라 집착하는 작용인 행의 마음 작용에 의해서 잘못 인식된 결과입니다. 괴로움의 발생이 생사에 있지 않고 생사를 색칠하는 업의 활동인 중생의 마음에 있습니다.

 

따라서 생사가 불만족으로 다가올 때는 우리들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고 집착하는 자신의 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변계소집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이때는 생사가 생과 사로 별개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생과 사로 나누어 생을 탐하거나 싫어하며 사를 탐하거나 싫어하게 되는데, 이것은 생사의 진실한 모습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마음 작용입니다. 169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를 여실히 지켜보아 집착하는 마음 작용인 행이 지멸될 때, 염처수행의 맑고 고요한 마음이 되고, 이때는 생사를 왜곡하여 상주론이나 단멸론과 같은 잘못된 견해를 갖지 않게 됩니다.

 

생사 속에서 빈 마음으로 법계 인드라망을 여실히 알게 되어 무상무아이 흐름을 볼 때 생사의 모습 그대로 열반적정이 됩니다.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