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_정화

18구.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백_일홍 2020. 1. 9. 08:33

(법성게) 제18구.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과 큰사람의 경지네

 

빈 모습 속에 나투는 지혜덕상의 부처님 세계가 보리심이며 대원력이니,

십불은 보리심을 말하고 보현 보살은

대원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보리심과

대원력으로 사는 모습을 말로 나타내어

큰 사람의 경지라 하고 있습니다.

 

(법계의 노래)

 

부처란 존재로서 무엇이 아니라

인연처에서 제 모습을 그 자체로 보고 있는

깨어 있는 활동이니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는 것은 망상

 

그렇다고 마음이 부처라고 해도 부처를 잃으리니

마음과 마음이라 할 어떤 것으로 있지 앟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깨어있는 생명활동이

보살이면서

부처님의 자비며

튼 사람의 삶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부처님가 보살과 큰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마음의 활동이

온생명의 법계를 드러내면서

부처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법계가 어떤 것으로 따로 있고

그 가운데 중생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마음마다 법계가 되어야

온생명을 사는 깨달은 삶입니다.

 

마음에서 보면

마음이 법계를 만드는 것 같고

법계가 마음을 얼굴로 삼는 데서 보면

마음이 생겨나는 것 같아

마음처럼 법계처럼 그렇게 있으면서

그 자체가 온생명의 변주가 되는 것

 

그러므로 오직 마음 그 자체가

법계의 인연으로 무상한 변주를 하는 것에

한 치의 틈도 없이 깨어 있을 때만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부처로 사는 것이며

법계의 빔을 실천해가는 보살의 길이며

큰 사람이 사는 모습일지니

 

뭇 생명이 삶들은 비교로서 크고 작음을 떠나

그 자체로 큰 사람의 큰 삶이 됐습니다.

 

그러므로 큰 사람들의 경지가 따로 있을 수 없고

뭇 생명들은 그 모습 그대로 법계의 활동이 되지요.

 

(강설)

마음 하나 꿰뚫어

 

화엄의 부처님세계는 한 법계로 비로자나 부처님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모든 중생과 사물의 얼굴 그대로 낱낱 부처님이 중중무진으로 겹쳐 있는 세계입니다. 이를 상즉상입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이 무한히 겹쳐 있으며서 연기실상인 비로자나 부처님 세계를 펼치고 있는 것이지요. 178

 

이와 같이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중중무진으로 겹쳐 있되 낱낱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무한한 부처님을 화엄에서는 완전수를 나타내는 10을 써서 십불이라고 합니다. 십불은 곧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냅니다.

 

부처님하면 역사적인 부처님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신 뒤에는 부처님의 법을 부처님의 몸으로 대신하니 오분법신(계.정.혜.해탈.해탈지견)들이 그것입니다.

 

나아가 화엄에서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는데 연기실상의 법을 부처님으로 모신 경우입니다. 그러면서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이 있게 됩니다. 모든 중생과 낱낱의 사물이 그대로 부처님의 법신을 이루고 있는 경우는 화엄의 법신 사상입니다. 연기법이 법신 부처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이란 정적인 상관 관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나타내게도 하고 없게도 하는 끊임없는 변화의 동성을 동시에 뜻합니다.

 

이 동성의 나툼이 모든 중생과 낱낱 사물의 모습인데 이들은 곧 부처님의 지혜 덕상입니다. 모든 모습이 제 모습이면서 동시에 모든 모습일 수 있는 상즉상입의 공능을 보신이라고 합니다. 179

 

법신, 보신의 두 분 부처님께서 낱낱의 얼굴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나타나 있으니 이를 화신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낱낱에서 보면 화신으로 제 모습이지만 이 모습을 관통하고 있는 법신과 보신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바로 삼신의 모습 그대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의 모습을 떠나서 삼신이 있다고 하면 불교 아닌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 삼신불이기 때문에 낱낱의 제 모습만으로 자기를 삼는다면 진정한 제 모습을 잃고 맙니다.

 

그러면 삼신불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대원력의 자비행입니다. 이러한 중생을 보살이라고 부르며 보현 보살이 그 대표입니다. 그러나 보현 보살이라고 해서 낱낱 중생을 떠나서 저 멀리 훌륭한 모습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실천하고 있는 중생의 활동이 보현 보살의 모습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갖추고 있는 지혜덕상이 언제 어디서나 자비로움으로 나투는 화신 부처님의 행동이 보살의 원력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기 바로 앞의 모습으로 중생세간에 있겠다고 원력을 세운 분을 보살이라고 하여 부처님가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만 진정한 보살의 모습이 곧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 열반의 세계인데 보살은 이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 곧 열반을 구하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부처님의 바른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이 분 보살님들게서는 중생과 같은 생사의 세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니 색 그대로 공의 모습으로 모든 번뇌를 떠나 있습니다. 보살이란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색즉시공)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공즉시색) 분으로 언제 어디서나 자유로운 가운데 삼신불의 모습을 그대로 나투고 있습니다. 180

 

이와 같이 열반조차도 끄달리지 않는 수행자의 모습이 곧 삼천대천 세계를 가득 채우는 부처님의 지혜덕상이니 이를 큰사람이라고 합니다. 큰 사람이란 크다 작다로 서로 견주는 가운데서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대승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화엄연기의 일법계가 바로 대승의 세계이며 이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큰사람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생각을 이어서 알아차려야 할 것은 부처님과 보살이 모든 중생 밖에 있는 어떤 위대한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자비를 행하는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엄의 상즉상입의 세계는 불보살의 경계일 뿐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생각 생각마다 텅빈 모습으로 모두를 이루고 있는 것을 여실히 살펴, 나라는 것이 허망분별에 따라서만 있음을 뚜렷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빈 모습 속에 나투는 지혜덕상의 부처님 세계가 보리심이자 대원력이니 심불은 보리심을 말하고 보현 보살은 대 원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보리심과 대원력으로 사는 모습을 할 수 없이 말로 나타내서 큰사람의 경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보리심과 대원력은 삼신 부처님의 근본이자 아울러 중생의 생명을 이루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때문에 화엄에서는 중생과 부처와 마음이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연기법계의 지혜덕상은 마음이 나툰 것으로 이 모습 그대로 부처의 세계입니다. 181

 

따라서 마음 떠나서는 부처도 찾을 수 없고 법을 알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떠나 법을 찾는 순간 우리는 법의 본성을 놓치고 비로자나불의 세계도 잃게 됩니다. 지금 일어나는 마음자리의 본성을 보는 것만이 모든 중생과 사물의 본성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 하나 꿰뚫어 아는 것 그대로가 모든 중생과 사물을 다 아는 것이다." (달마대사)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