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제21구.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비가 허공에 가득하니
빈 마음이 되어 조그만 바람마저
없어졌을 때 도솔천의 삶을 뛰어넘어 비로자나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삼라만상 낱낱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으로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곧 온 우주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법계의 노래)
뭇 생명들은 모두
이웃하는 생명들의 덕으로 살아가니
이웃으로 퍼지는 생명의 힘이
서로를 살게하기 때문입니다.
곧 살아가는 모든 곳이
서로에게 베푸는 덕으로 가득하니
허공은 그저 허공이 아니라
생명들이 베푸는 덕으로 가득한 곳이지요.
텅 빈 듯 보이지만 덕으로 가득 차 있는
법계의 빈 모습이
인연따라 제 모습을 이루는 것이 드러난 생명이니
생명들의 인연은
모습이 있다고도
모습이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그러므로 제 모습만을 생명으로 보는 순간
온생명으로 있으면서도 고립된 삶이 돼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 불만족을 키워가는 고단한 삶이 되어
스스로도 이웃도 아픔으로 살게 하지요.
그것은 생각에 갇힌
우리들의 자화상
그러나 생각 너머까지 작용하는
허공 가득한 덕이
마침내는 부사의 한 곳에서 일어나는
생명나눔을 알게 할지니
뭇 생명들의 덕은
바람없는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람없는 나눔으로
뭇 생명들에게
두려움 없는 삶의 자리를 펴는 것이
보살의 활동이면서
그 자체로 생명의 본질을 실천하는 길이 되지요.
이것은 말로 생각도 넘어선 것으로
허공 같은 빈 마음이면서
이웃에게 베푸는 덕으로 가득하며
보배로운 비가 되어
생명의 빛을 나누는 활발한 활동으로
마음 빔은
우주의 생명이 드러나는 것
부처님
(강설)
빈 마음의 보배로운 삶
욕망이란 나와 나의 것을 가지는 마음입니다. '나'가 있는 한 그것을 채우는 나의 것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세우고 나면 만족할 줄 모르는 나의 것을 가지려는 묙망의 끝은 슬픔으로 끝나고 맙니다.
'나'가 있는 한 '너'가 있고 너의 것이 나의 것이 되기 전까지 계속되는 부족함은 설사 너의 것이 모두 나의 것이 된다 해도 그칠 줄 모르는 목마름, 끝내는 허무의 늪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현재에도 사회에서 그 지위나 경제 면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고 여긴 사람들 가운데에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되돌아보는 순간 허무로 채워지는 절망감 앞에 한없이 무력해지다 끝내 아이의 정신상태로 퇴행해 버린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욕망이란 끝이 일을 수 없습니다. 그 본질이 꿈같고 이슬같기 때문입니다. 찬란한 무지개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손을 내밀면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는 허상을 좇는 것이 욕망의 모습입니다. 이 허상의 욕망에 대한 허위의식이 절대적 지배를 바라면서 사회적 불만족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196
그 결과 사회적 허무 앞에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서 절망하고 있는 군상이 시대 시대의 역사 현상일 것입니다. 욕망을 좇고 있는 현실의 자기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무런 바람 없이 황소가 물을 들여다 보듯 자기 삶을 투명하게 비켜봐야 합니다. 바람 없이 지켜보지 않으면 허위의식에 숨막혀 있는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단지 지켜보십시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십시오. 어느 것에도 기대지 마십시요. 지금껏 우리가 기대어 왔던 모든 것들은 허상을 좇는 의식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스스로가 만든 허상에 스스로 얽매여 있는 현실을 놓으십시요. 이 생각에서 자유스워질 때 연꽃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나가듯 슬픔의 현실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때 그렇게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던 찬란한 무지개가 성큼 자기 앞에 공존하게 됩니다. 그저 지켜보는 것으로 있을 때 함께 살아 있습니다. 현실을 가지려는 자에 따라서 비틀어지기도 하지만 지켜보는 자에게는 빛으로 존재합니다. 지켜봄이란 삶조차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삶을 놓을 때 삶이 삶답게 살아나면서 현실에 만족하게 되고 집착은 사라집니다. 개인과 국가가 그 소유를 키우려고 하는 현실, 소유가 많은 만큼 잘 산다는 비틂 앞에 "끄달리지 말라"는 가르침이 무슨 힘이 있을까? 많이 소유하는 것은 그만두더라도 하루하루의 삶에서 실존의 절망을 감당해야 할 가난은 또 어떻게 할까? 197
개인과 사회의 절망을 해소하는 것은 소유를 비우는 데서 출발합니다. 보시가 그것입니다. 나누고 나누어 가장 적은 것으로 살 때 도솔천의 삶이 됩니다.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삶이 개인과 사회적 실존을 지켜가는 오직 한 길입니다.
이 길이 바로 해인삼매의 터전을 닦는 것입니다. 적게 가진 만큼 온 삶을 살게 되지요. 이때 보는 삶은 비가 금이 되어 내려도 끝나지 않는 갈증이 아니라 보는 것마다 듣는 것마다 부처님의 모습이며 설법이 되어 따로 기댈 곳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열반을 구하려는 마음조차 쉬어버린 빈 마음이 되어 조그만 바람마저 없어졌을 때 도솔천의 삶을 뛰어넘어 비로자나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삼라만상 낱낱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으로 보배 가운데 보배입니다. 곧 온 우주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모습으로 나투는 빈 마음의 공덕은 끊임없는 시공간에서 빈틈 없이 존재합니다. 하나라도 모자람이 없어 일법계의 모든 것을 꿰뚫고 모든 생명들을 살찌게 하면서 그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하고 있는 법계일상이 바로 빈 마음입니다. 198
중생이 본디 빈 모습으로 상즉상입의 일법계를 자신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정을 넘어선 그곳에서 참으로 만족해 있는 자신으로 살게 됩니다. 만족된 삶으로 언제 어디서나 살고 있는 것을 보배비가 허공에 가득하다고 비유했습니다. 중생의 삶이 그대로 법계를 가득 채운 보배가 되는 것으로 이밖에 다른 보배가 없습니다.
온갖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벗어나 참으로 빈 마음의 삶, 해인삼매의 삶, 본디 마음자리인 여의보배의 삶이 풍성하게 나툰 그 모습 그대로가, 어떤 비유로도 나타낼 수 없고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어떤 생각으로 헤아리리 수 없는 부사의한 부처님으로 사는 모습입니다.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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