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공사간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힘들고 슬펐던 게 '어른이 되지 못하(않)는 어른'과 함께 있어야 할 때였다.
1. 어른 이란, 옆 사람보다 떡을 하나 적게 먹어도 넉넉히 보아 넘길 수 있는 깜냥을 지니게 된 일을 말한다. 더붙여, 굳이 꼬집어 말하자면, 자기에게 떡이 하나 덜 오게 된 사정에 이미 자기 자신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아채는 일이겠다. 떡, 이라고 특징했건만, 이는 돈일 수도 있고 관심이나 인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요체는 '쾌락의 지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쾌락의 지점'이 희소성의 원리에 휘말려들어 분쟁을 낳게 될 무렵, 시중을 좇아 그 분배에 슬금할 수 있는 배포를 갖는 일이다. 누구나 좋아라 하고 쏠려가는 데가 곧 위태한 곳이며, 이곳에서 지혜를 부릴 수 있는 이가 곧 어른이다.
2. 특히 공동체의 구성에서 과도하게 인색한 사람은 이 논의에서 증후적이다. 이는 이른바 '합리적 이기심'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 이유를 딛고 특혜를 얻으려는 태도와 습성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 주목할 곳은 이들이 스스로를 재현하는 방식이다. 대체로 이들은 자신을 (아직) "어른이 아닌 존재'로 표상하곤 한다. 혹은 이런저런 형식의 '(사회적) 약자성'에 의지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이런 표상장치를 꾀바르게 오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존재가 그 장치에 얽혀 들어있는 탓에 스스로 이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이이다.
유독한 부모가 다 큰 자식을 유치화시킴으로써 지배를 지속한다면, 공동체 속의 인색한 이들은 이런 유치화의 기제에 올라타고 어리석은 쾌락에 몸을 담근다.
3. 관련되는 주제로서, 식탐은 재미있고 귀여운 사례에 속한다. '어른이 될 수 없음'과 '쾌락의 지점' 사이의 관계를 이처럼 요연하게 밝혀주는 사례도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특히 아이들 세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식탐은 외려 어른들의 문제다. 음식을 앞에 두곤 일순 그 표정과 태도가 표변했던 이들이다. 배식할 때 짐승들이 보이는 모습을 영락없이 빼닮았는데, 거기에는 인간의 기원이 힐끗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정녕 인상적이었던 것은, 잠시 '아이-짐승'으로 변해버린 이들이 그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더라는 사실이다. 음식-쾌락을 넘어서야만 어른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금욕이 아니라 절욕이면 족하기도 하지만, 모든 쾌락의 지점처럼, 음식도 인간의 정신적 성숙을 엿보게 하는 창구가 될 수 있다는 것.
4. '자라지 않는 어른'의 문제를 논의하는 방식은 여럿이나, 전술한 '쾌락의 지점'을 살피는 게 요령이다. 고래로 중용의 지혜를 하늘 아래 제일로 꼽는 것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선은 과잉한 경우다. A는 포실한 집안 출신으로 양순한 부모의 관심을 흠뻑 젖어 성장한 외동딸이었다. 내 주목을 끌게 된 것은 그녀가 동학들을 대하는 방식 때문. 손쉽게 부탁이나 요구를 남발하는 게 마치 '아씨가 하인을 부리듯'했다. A는 쾌락의 지점을 성정, 배치하는 감성과 깜냥이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는 성장기에 과잉한 쾌락에 독점적으로 노출되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이웃이라는 쾌락소비자'들과 슬금하게 어울려 지낼 수 있는 지혜와 배포를 키울 수 없었다.
5. 다름은 쾌락의 노출이 과소한 경우다. 이 경우는 과잉한 경우와 달리 다소에 관한 판단이 매우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내 쾌락은 왜 적은가?'라는 의식은 '아이로 남아 있는 어른'의 문제를 규정하는 정식이며, 생각보다 널리 퍼져 있는 원망이다. 이는 유달리 운이 좋지도 않았고, 각별한 공부의 이력을 지니지도 못한 보통사람들의 정서인 셈. '쾌락'의 관점에서 유치한 어른을 대별해본다면, 전술한 A나 김용옥 씨와 같은 이들은 한결같이 많은 쾌락을 독점하려는 타입인데 비해, 이 보통사람들은 늘 적었거나 혹은 빼앗겼던 쾌락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6. 성인의 유치함에 접근할 때에는 그 기저에 흐르고 있는 '억울함의 정서'를 세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 물론 억울함과 유치함은 어긋나는 지점이 적지 않지만, 그 교집합을 잘 헤아리는 게 분석의 첫걸음이다. 내가 보기에 '(정신/양혼이) 자리지 않는 어른'이라는 과제에서 주관적 억울함의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독특하다. 우선 이 문제가 광범위하게 복류하고 있지만 흔히 은폐되거나 증상적으로 변질된 채 유통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정작 이문제의 심각성은 그 영향이 심리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른바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뿌리를 내린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억울함의 긴 터널을 넘어 되돌아갈 수 없는 하얀 의욕을 얻는 일은 인문학적 성숙의 알천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불천노의 지혜는 여기에서 멀지 않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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