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된다는 것은, 정확히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책임이 아닌 듯이 보이는 불행에 직면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 생텍즈베리, <인간의 대지>
단독자로서의 개인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다.
...
비평자의 첫 마음은 비평을 받는 자의 첫 마음을 어렵사리 경유하고 초극함으로써 비로소 생성된다. 이것은 기묘한 결론이지만, ,대개의 인물비평이 먹히지 않는 이유를 밝히는 협지는 이렇게 생기지 않을까? 다 아는대로 비평을 받는 자의 첫 마음은 대체로 '억움함'이다.
사람들은 내남없이 집요하게도 억울해한다. '아이를 낳은 처녀'만 할말이 있는 게 아니며, 나라 전체를 뒤집어 탈탈 털어먹은 최순실 씨만 억울한 게 아니다. 지난 세월 내가 그 내면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사람치고 억울함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제 각각 제 마음대로 억울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을 보상받기 위해 제 각각 제 마음대로 '생각'하고 움직였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채울 수 없다'고 했지만, 실로 억울하기에 그것이 사람의 '에고'인 것이다. '억울하기에 사람', 이라면, 공부하는 일은 바로 이 억울함의 조건을 넘어서려는 지속적인 노력일 수밖에 없다. 인문학적, 수행적 실천이 필경 에고와의 투쟁이자 그 억울함의 해원이면, 비평자의 첫 마음은 무엇보다도 그 '억울함의 존재론'에 입각함으로써 생성된다.
'억울함의 존재론' 속으로 몸을 끄-을-고 들어가 보는 체험은 그 모든 비평자가 비평의 공정을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선결요건이다. 그러나 이는 보살행처럼 어려운 일이니, 인물비평이 첫 단추부터 어긋나는 이유가 있다. 비평자가 우선 '억울함의 존재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비평의 대상이 된 사람의 도리는 우선 그 억울함의 정한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마음을 비워 억울함을 초과하는 도량을 얻는 일은, '억울하므로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감히 넘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공부하고 수행하는이라면 여기에 영혼의 구원의 비밀이 있다고 여겨,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채는 심경으로 혼신의 노력을 쏟을만하다. 꼬리를 잡아채는 순간 잡아먹힐 수도 있지만, 꼬리조차 잡아보지 않고선 자신의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억울해!라는 항의는 괴물인 것이다.
박근혜 씨도 억울해하고 있을까? 이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어 보인다. 앞서 말한 일반론을 좇아도 그러하고, 그의 독특한 성장 환경, 대인관계적 태도, 그리고 추정가능한 심리적 특성에 비추어보아도 그렇다. 역설적이게도, 내 판단에, 마치 그의 생활 여건과 경력이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처럼 그의 억울함도 실로 '한량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의 억울함에 깊이 스며들어 공감할 능력은 부족하지만, 그의 억울함이 제법 별스러울 것이라는 점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국민의 다수가 손가락질을 하는 박근혜 씨를 변호할 요량이나 의욕은 없어도, 억울함에 대한 그 자신의 정서와 소회에는 그리 힘들지 않고 접근할 수 있을 듯하다. (왜냐면) 사람은 내남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악착같이 '역울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의 밥에 든 콩이 더 커보이고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인간이라는 반자연적 자연의 생리이며, 이 생리는 억울함의 정서를 통해 공감의 주술을 부리고 자아의 잔여를 퇴행적으로 배설한다. 비록 어떤 억울함은 괴물스럽다고 해도 타인의 억울함을 쉽게 다룰 수는 없는 법이다.
억울함은 오직, 그리고 필경 자기의 몫이며 자신의 책임이어야 한다. 물론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라면 수리와 보상, 배상과 해원, 심지어 징벌적 처벌의 장치까지 갖추어 합리적으로 대처하는게 마땅하다. 하지만 억울함의 실존적 차원이 밝혀진 이상 이러한 장치와 제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자신의 억울함에 대한 투쟁이 필경 자신과의 투쟁이라는 시실을 깨단하지 못하는 한, 그 억울함은 한량이 없고 그 투쟁은 점점 요사스러워져 간다. 요컨데, '억울함'에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서는 괴물이 되기도 하고 현성이 탄생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래도, 괴몰은 되지 말자'고 외치지만, 괴물의 문이 열린 자리를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에 공감하고 넉넉한 태도로 돕는 일은 이웃됨의 당연한 도리다. 그러나 겹눈을 뜨고 억울함이 감춘 괴물의 씨앗에 주목하는 이는 드물다. 억울함은 정서적으로 되먹임 되는 경향이 잦고, 기왕에 이기적인 인간을 더욱 이기적으로 몰아가며, 타자성의 경계를 깡그리 무시하게 한다. 억울함의 붉은 그늘은 강자와 약자를 가리지 않는다. 강자의 억울함은 당장 위험해지지만, 약자의 억울함도 곧 위험해진다.
잘못을 저질러 비난받으면서도 여전히 억울해하는 자의 의무는 바로 이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이웃을 보호하는 일이다. 그것은 에고의 집요하고 요망한 자기변명의 체계를 깨트리고 책임의 윤리를 '획득'하는 일이다. 부끄러움이나 윤리성은 외부의 지탄과 강요에 의해 수동적으로 내몰리는 지점에서 멈춰서는 안된다. 도덕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윤리는 어렵사리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억울함의 주초와 들보에 의해 건설된 변명의 체계를 깨거나 버리고 떠나는 일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후미진 구석에 숨어 번식하는 곰팡이와 세균같은 억울함을 두 눈 부릅뜨고 닦아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윤리든 자기변명과 변덕의 체계에 의해 잠식되기 때문이다. 윤리가 마지막으로 향하는 타깃은 외부의 적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보존의 정서적 기동성을 옹위하듯 에워싸고 있는 억울함, 혹은 자기연민이다. 억울함은 그 속성상 부풀어 오른다. 그러므로 이런 정서에 원칙과 방향을 제시해서 일관되게 처리하지 못하면 비윤리적 자기함몰은 필연적이다. 에고와의 싸움이란 필경 정서와의 싸움이며, 그 정서를 넘어서 사고하고 그 사고에 터한 행위를 선택하는 일이다. 무릇 공부하는 일과 조금 낫게 살려는 노력은 자신의 기분과 허영을 넘어서서 사고하고 행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박근혜씨(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자력의 불가능성과 자의의 초라함을 깨닫고 빈 마음을 얻어 '참회'의 가능성을 되찾는 일이다. 참회라는 다분히 시대착오적 말에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내가 죄인입니다~!'는, 그런 따위의, 내몰림의 끝에서 하릴없이 묵수하는 최후의 자기변명을 가리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그 이름이 누추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외려 억울함이라는 괴물의 탄생을, 그 위기를, 오히려 호기로 여기고 그 존재의 방향을 뒤집는 데 신명을 바쳐볼만하지 않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참회의 반대만은 억울함이다. 그리고 만약 전술한대로 '억울함으로 인간'이라면, 참회는 다만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됨의 숙명을 뒤집어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존재론적 선택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뜻하는 참회란 '성취이며, 그것도 인간으로서 희망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취다. 그 성취는 나와바리를 넓힌 게 아니며, 재산을 불린 게 아니고, 세상의 학식을 두터히 한 게 아니며, 자신의 인기나 지명도를 높인 게 아니다. 이윽고 이기적인 선택들을 다 빼앗긴 채 궁지로 쫓겨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신세를 꾀하고자 혀를 조작하는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의 허영과 억울함이 감히 넘보지 못한 지경을 얻어 자유로워진 존재의 변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회란 삶과 죽음을 한 줄로 묶어 보는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성취다.
인간이 되는 것의 가장 중요한 몫은 바로 책임이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배운다는 것이 대체로 힘겹게 사적 정서를 넘어 사고하고 실천하는 일이라면, 책임을 지는 일, 그리고 결국 인간이 되는 일은 배우는 일과 본질적으로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책임은 자기연민이나 억울함과 싸우는 과정을 통해 어렵사리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간됨과 억울함의 관계는 중층적이다. 남을 모방하거나 매사 억울해 하는게 인간의 과거이긴 했지만, 그런 식의 경상적(거울상적인) 반응이나 원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도 또한 인간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억울함의 거울을 깨고 원망의 늪을 헤쳐나오는 일은 대개의 공부와 수행이 수렴되는 샛길인 '초월성'에 다가선다. 그리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샛길이 인간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건드린다는 것이다.
'차마, 깨칠 뻔하였다_김영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자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 (0) | 2020.02.15 |
---|---|
이미 즉은 것, 인간이다 (0) | 2020.02.15 |
호기심과 무용심 (0) | 2020.02.15 |
어른, 어른이 되지 못하는 (0) | 2020.02.09 |
깜냥을 키우는 대중적인 방법, 10가지 (0) | 2020.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