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은 현대(인)의 병증이다. 새로운 것을 향한 욕망은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삼아 윤전시키는 도시자본주의의 본질이자 그 깜냥이다. 그런 뜻에서 부스대는 호기심은 우리 시대와 그 장소의 증상으로서, 이는 신경증 일반을 문명병을 여기거나 우울증을 도시사회의 증상으로 여기는 진단화 흡사하다.
호기심의 실체를 이해하려면 우선 이 마음의 자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데, 그 외부가 곧 집중이다. 집중의 상태를 파쇄하려는 쉼 없는 마음의 움직임을 '기심'이라고 한다. 호기심이란 기심의 현대적 변용태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생활세계 일체가 번거로워진 현실 속에서 인간정신의 집중-수위가 낮아지는 데 기인하는데, 이로써 기심이 집심의 자리를 전반적으로 대체하게 된다.
호기심을 창발성과 연계시키는 주장이 적지 않지만, 이는 단견이다. 대체로 호기심은 베스트셀러에 접근하게 하지만 뉴턴이나 헤겔을 붙들고 있도록 돕지는 못한다. 하이데거 식으로 평하자면 호기심이란 대중이 잡담 속에서 애매하게 운용하는 마음의 버릇인 것이다. 호기심이 오용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좋은 참고점이 될 만한 게 이른바 '창의성'이다. 실은 '창의성(교육)'처럼 매력적일만치 오해가 심한 용어도 없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창의성이란 전문성의 '틈'에 의해 가능해지는 현상이므로, 아마추어적 한사의 이미지만을 흩뿌리고 있는 호기심을 바로 창의성의 문턱에 배치하려는 발상은 우스광스럽고 물색없는 짓이다. 호기심의 창구를 통해 '행운'에 이를 수 있을 지 모르나, 필경 '행복'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차리리 창발성을 무용심에 이어붙일만할 것이다. 무용심이란, 바이러스처럼 번져가는 호기심의 섬유를 일시에 끊어버린 빈터에 조응하는 '마음이 없는 마음', 즉 어떤 상태의 집중이다. attentiveness 수많은 학인들과 수행자들이 다른 이름을 붙이거나 다르게 설명하기도 했지만, 그 요체는 일차적 '기능주의의 관련성'을 향해서 마음의 표상을 줄세우려는 태도와 근본적으로 버성기거나 어긋내는 한적경이라는 무심이다. 욕심과 언어조차 끊어져 버린 '가만한' 집중의 상태 속에서야 영혼은 제 자리를 찾아간다. 내가 한때 무능의 급진성을 애기한 것처럼, '무용즉대용'이라고 하는 가능성의 텃밭, 말이다.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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