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모임에 남자들이 차츰 보이지 않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 돌아보면 성비가 맞춤한 듯할 때도 있었건만 언제부턴가 그들의 자취는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가뭄에 콩 나긋 드나드는 남자들은 따개비처럼 자신의 생각 속에 머물거나 혹은 반-건달처럼 왁달박달거리면서 공부-장소(감)의 버릇을 익히는 데 실패했다.
흥미롭게도, 꾸준히 공부를 계속하는 몇 안 되는 남자들은 이미 그 '남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는 대로 생물진화의 사실은 결코 눈대중할 수 없지만, 나는 바로 이 교차/교체 속에서 어떤 멸종과 신생을 벼락처럼 읽는다.
술집에 있다거나 '삼성'에 갔다, 거나 혹은 도서관에 박혀서 토익공부를 하고 있다는 따위의 설명만으로는 우리 시대 남자들의 행방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정신분석학적 패턴지에 의하면 남자들의 성정이나 행태를 '강박'으로, 이와 대조해서 여성들을 히스테리라는 심적 구조로 분별해서 그 움직임의 개요를 설명할 수 있다.
강박이란 쉽게 말하자면 체계구성적 욕심이다. 자신의 경험이나 선입견으로 건축된 관념의 건물을 고수하려는 태도와 사고방식이며, 타자들과의 열린 관계를 통해 '변증법적으로' 통기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강박증자가 하나의 진실(관념)을 고착된 듯 추구한다거나, 상대(분석가나 애인, 혹은 여성일반 등)가 죽은 듯이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는 식의 임상적 관찰은 이러한 설명과 잘 부합한다. 이 경우에도, 수십, 수백만 년 동안 남자들은 제 땅을 지키고, 제집을 짓는 존재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되새기게 만든다. 결국 '관념'이 진화의 마지막 생산물 중의 하나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 한때 무리를 위해 집을 짓고 지키던 이들이 어느새 '관념'의 성을 쌇아 지키고 있는 사실을 이해할 만도 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남자들이 다 어디에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죄다, 제 '생각'의 성탑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지난 수십년간 대학의 바깥에서 이런저런 철학-인문학 모임-공동체를 열고 또 겪어온 내 개인의 경험도 그렇지만, 특히 남자들은 선생의 노릇을 하는 나에게, 혹은 내가 방편적으로 제시한 공부의 틀에 대해 이런저런 모양의 '거부'(감)을 드러내곤 했다. 이것은, 여자들이 비교적 소극적 '저항'을 내비치는 현상과 제법 분명한 대비를 보이기도 한다. 남자들의 거부는 "자신이 타자로부터 독립된 존재라고 굳게 믿는 가박증자가 분석을 거부하는 것"과 조응한다. 그러나 이 거부는 이미 양가적이다. 애초에 접근하지 않는다면 거부할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 분석을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분석가가 필요한 것처럼 공부를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남자들은 '무시 받은 선구자'로서의 선생이 필요한 셈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고 하였지만, (남자들의 세계에서) 대체로 그 스승은 거부당하거나 무시 받을 수 있도록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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