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깨칠 뻔하였다_김영민

한국남자들, 혹은 건달들

백_일홍 2020. 2. 15. 12:59

한국의 남자는 거개가 건달이다. 표정도 건달이고 눈매도 건달이고 매무새도 건달이다. 앉아 있어도 건달이고, 서서 걸어도 건달이다. 밥을 먹을 때도 건달이고, 악수를 할 때도 건달이고, 모르는 여자를 대할 때도 건달이고, 심지어 발제는 하거나 강의를 할 때도 건달이다. 핸드폰을 놀리거나 담배를 피울 때는 더더욱 건달이니, 술을 먹을 때에는 살펴 말할 건덕지조차 없다.

 

수퍼마켓 주인남자도 건달이고 돼지국밥집 주인남자도 건달이고, 안경집 주인남자도 건달이다. 교수 남자도 건달이고, 시간강사 남자도 건달이고, 대학원생 남자도 건달이다. 중도 건달이고 목사도 건달이고, 모모한 도사조차 알고 보면 건달이다. 우리 동네 은행지점장 남자도 건달이고, 우리 동네 편의점 주인남자도 건달이고, 우리 동네 추어탕집 주인남자도 건달이다. 택시기사 남자는 말할 나위도 없는 왕건달이고, 치킨집 주인남자는 순 날건달이고, 밀양의 시의원이라던 그 친구도 통짜로 건달이다. 아랫집 남자도 건달이고, 뒷집 남자도 건달이고, 옆집 남자도 건달이다. 이미 초등학생 남자들조차 건달을 향해 왁달박달하게 내달리고 있으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남자들이면 꽤 어엿한 건달이다.

 

건달-인간형은 좋게 말해서 시대착오의 서구적 중세인, 그것도 왜곡된 중세인이다. 이를테면 내가 다른 글에서 "그것(건달)은 자본주의적 삶과 더불어 공생하고 있는 중세적 유토피아 의식의 도착일 뿐 아니라 그것이 마른 오이처럼 졸아든 징후"라고 요약한 것과 일치한다. 러셀이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규율을 지키고 봉사의 삶을 추구하며 고귀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중세인들"이 사라진 공백을 채우는 하이에나나 불개미와 같은 존재들인 셈이다.

 

잘라 말해서 건달이란 산업사회적 노동의 분배와 그 성격화에 실패한 일을 말한다. 혹은 중세적 권위와 명예를 시대착오적으로 재생산하려는 소비사회의 도착적 일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건달형 인간은 근대적 직업윤리의 외부를 자유의 영역으로 착각하거나, 혹은 생리적으로 사적 판타지에 젖은 과거의 몸을 지닌 채 현실사회의 합리성에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중세를 극복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직업윤리'의 내면화이므로, 한국적 건달인간의 탄생은 필경 한국적 근대화의 조건과 그 한계 속에서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과거는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만치 강고하고 혁혁한 문사의 사회였으므로, 불과 한 세기를 지나오는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국민의 태반이 건달화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사건으로 야무진 분석을 요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 현상을 분석할 때에는 건달-현상이 일본 같은 수직적 칼의 사회가 아니라 오리혀 말의 사회에서 생겨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논의는 내가 이미 여러 글에서 언급한 바 있는 '죽어도 죽지 않는 문사들'의 이치로부터파생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문사사회의 언술이 내생적으로 갖춘 '질서적 비질서'의 생태는 한 치만 어긋나도 곧 건달의 자리로 미끌어진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은 사무라이의 사회, 혹은 진정한 깡패의 사회이므로 건달 따위가 일상의 낮은 자리를 채울 수 없다. 깡패라는 전문가가 없는 사회는 곧 건달이라는 아마추어적 존재들이 할개를 치는 사회인 셈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근현대적 직업사회 속에서 전문가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그 생태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시한 아마추어들의 허접한 외장이 마치 곰팡이나 바이러스처럼 전염되고 창궐할 수 있는 데에는 다만 건달스러운 개인들이 늘상 격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매체적 효과만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바의 내재적인 원인, 즉 '근대적 집업윤리의 내면화'에 실패한 사실로부터 그 구조적 원인을 염출해낼 수 있겠다. 한국적 근대화의 허실과 명암에 대한 논의는 이미 여러 차례 담론의 홍수를 치렀고, 급속, 농축, 표피, 타율, 편파 등등의 개렴즐로써 그 문제들이 상설된 바 있다. 시대가 변하면 곧 이를 대변하는 표상형식이 바뀌고 이를 기술적으로 매개하는 매체가 바뀌는 법이다. 그리고 이른바 자기 정체성은 이 표사형식과 매체에 의해서 수행적으로 재구성된다.

 

나는 만일 내 가설-'한국의 남자는 (직업에 상관없이) 거개가 건달이다'-이 소루하고 퉁명스러운 것이긴 해도 그 나음의 이치를 쟁이고 있다고 하면,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직업전문가적 인간의 탄생과 그 자기정체성의 구성에서 실패한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판단한다. 내가 다른 글에서 "건달은.... 축제와 폭력의 세계를 (일없이) 동경하는 고중세적 감수성에 기대지만, 다만 노동이라는 산업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으려는 판타지"라고 정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