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향모를 땋으며

향모를 땋으며(10)_받드는 거둠

백_일홍 2024. 7. 25. 14:31

받드는 거둠 Honorable Harvest

고사리밥 같은 잎들이 퍼지고 은은한 꽃향기가 감도는 이런 날은 샘이 난다. "네 이웃의 엽록체를 탐하지 말라"라는 말이 좋은 조언임을 알지만 엽록소에게 질투가 나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이따금 나도 광합성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존재하는 것만으로, 풀밭 가장자리에서 하늘거리거나 연못 위에 한가로이 떠 있으면서 가만히 햇볕을 쬐기만 해도 먹고살 수 있을 테니까. 그늘을 드리운 나뭇잎과 물결치는 풀잎은 당 분자를 만들어 굶주린 입과 구기에 넣어주면서도 솔새의 노래소리에 귀 기울이고 물 위에 일렁이는 빛의 춤을 지켜본다. 261

남들을 행복하게 하면 무척 뿌듯할 것이다. 다시 엄마가 되는 것, 다시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 같을 테니 말이다. 그늘, 약, 열매, 뿌리 - 그 방법에는 끝이 없다. 내가 식물이라면 모닥불을 지피고 둥지를 떠받치고 상처를 치유하고 보글거리는 냄비를 채울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 너그러움은 내 깜냥을 넘어선다. 나는 남들이 변화시키는 탄소를 먹고 사는 종속영양생물heterotroph일 뿐이니까. 살려면 먹어야 하는. 그게 세상 이치다. 생명과 생명의 교환, 내 몸과 세상의 몸 사이에 끝없이 이루어지는 순환.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솔직히 종속영양생물로서의 역할을 고를 것 같다. 게댜가 광합성을 할 수 잇으면 리크를 먹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남들이 나 대신 광합성한 결과를 가지고 먹고 산다. 나는 숲바닥의 활기찬 잎이 아니다. 나는 바구니를 든 여인이다. 문제는 이 바구니를 어떻게 채우느냐다. 온전히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위해 주변의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에 대해 도덕적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야생 리크를 파내든 시장에서 장을 보든, 우리가 취하는 생명을 온당하게 대하는 방식으로 소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62

주변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과 먹고살기 위해 그 생명을 취하는 것 사이의 불가피한 긴장을 해소해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삶의 조건이다. 262

생명과 생명의 교환을 주관하는 원칙과 실천에 대한 토착 계율을 뭉뚱그려 '받드는 거둠Honorable Harvest'이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취함을 주관하고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를 빚고 우리의 소비 욕구에 고삐를 죄는 규칙이다. 그래야 일곱째 세대에도 세상이 지금만큼 풍요로 울 것이다. 구체적인 조항은 문화와 생태계마다 천차만별이지만, 기본 원칙은 땅과 가까이 사는 거의 모든 부족이 동일하다. 266

받드는 거둠의 구체적 조항:
자신을 보살피는 이들의 방식을 알라. 그러면 그들을 보살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소개하라. 생명을 청하러 온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라. 취하기 전에 허락을 구하라, 대답을 받아들이라.
결코 처음 것을 취하지 말라. 결코 마지막 것을 취하지 말라.
필요한 것만 취하라.
주어진 것만 취하라.
결코 절반 이상 취하지 말라. 남들을 위해 일부를 남겨두라.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수확하라.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용하라. 취한 것을 결코 허비하지 말라.
나누라.
받은 것에 감사하라.
자신이 취한 것의 대가로 선물을 주라.
자신을 떠받치는 이들을 떠받치라. 그러면 대지가 영원하리라. 272

받드는 거둠의 규칙은 물리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 둘 다에 대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삼는다. 수확되는 존재를 사람으로, 인식 능력과 지능, 영혼이 있는 '인간 아닌 사람'으로,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면, 자신의 생명을 지탱하고자 다른 생명을 취하는 일의 의미가 훨씬 커진다. 272

나는 과거처럼 오늘날에도 반드는 거둠이 땅의 법칙이라면 어떻게 될까 즐겨 상상해본다. 쇼핑몰 부지를 찾아다니는 개발업자가 미역취, 초원종다리, 모나크나비에게 토지 취득 허가를 구해야 한다고 상상해보자. 그가 결과에 따라야 한다면 어덯게 될까? 그렇게 못할 이유도 없지. 273

감사의 문화에 깊이 뿌리 박은 이 고대의 규칙은 필요한 것만 취하는 것을 넘어서 주어진 것만 취하라는 것이다. 273

땅속 깊이 묻힌 석탄을 취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힐 수밖 에 없으므로 이는 규칙의 모든 조항에 위배된다. 상상력을 아무리 잡아 늘여도 석탄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어머니 대지님에게서 석탄을 끄집어내려면 땅과 물에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다. 애팔 래치아 산맥의 오래된 습곡에서 정상을 없앨 작정인 석탄 회사로 하여금 주어진 것만 취할 수 있도록 법률로 강제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해서 필요한 에너지를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주어진 것만, 받들며 취하라는 뜻이다. 바람은 매일 불고, 태양은 매일 빛나고, 파도는 매일 바닷가에 밀려오고, 발 아래 대지는 따스 하다. 우리는 이런 재생 가능 에너지원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구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지구 위의 생명들에게 공급된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원들은 대지를 파괴하지 않고도 이용할 수 있다. 태양 에너지, 풍력 에너지, 지열 에너지, 조류 에너지 같은 이른바 '청정 에너지'는 슬기롭게 이용하기만 한다면 받드는 거둠의 옛 규칙에 부합한다. 277

가르침에 따르면, 거둠이 받듦이 되려면 취하는 것의 대가를 내어 주어야 한다. 라이어널이 담비를 돌보면 그의 덫길을 다니는 담비가 많아지리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담비가 목숨을 잃으리라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어미 담비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이타행이 아 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생명이 생명으로 흘러드는, 우리 의 연결에 대한 깊은 존중이다. 더 줄수록 더 취할 수 있다. 그는 취 하는 것보다 더 주려고 애쓴다.

라이어널이 이 짐승들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 짐승들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돌보는 것은 감동적이다. 그는 사냥감을 사랑하기에 갈 등을 겪고 있으며 받드는 거둠의 규칙을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이를 해소한다. 하지만 담비 생가죽이 매우 부유한 사람, 아마도 서드베리 광산 소유주의 고급 외투가 되리라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287

이 짐승들은 그의 손에 죽을 테지만, 그때까지는 그의 손길을 받으며 잘 살 것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비난한 그의 생활 방식은 숲을 지키고 호수와 강을 지킨다. 그 자신과 모피 사냥꾼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숲의 뭇 생명을 위해서. 거둠이 받듦이 되려면 취하는 이뿐 아니라 주는 이도 먹여 살려야 한다. 라이어널은 이제 유능한 선생이기도 해서, 많은 학교에 초청받아 야생 동물과 보전에 대한 전통 지식을 나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287

식물이 이 열매를 만든데는 우리가 열매를 취하여 확산시키고 파종하도록 하려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우리가 그들의 선물을 이용함으로써 두 종 다 번성하며 생명이 확장된다. 하지만 서로에게 뚜렷한 유익이 없는데도 무언가를 취한다면, 누군가 손해를 보게 된다면 어떨까? 

라이어널의 회사, 농담조의 회사 이름

"더 보고 덜 하라 See More and Do Less" 

이 짐승들은 그의 손에 죽을 테지만, 그때까지는 그의 손길을 받으며 잘 살 것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비난한 그의 생활 방식은 숲을 지키고 호수와 강을 지킨다. 그 자신과 모피 사냥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숲의 뭇 생명을 위해서. 거둠이 받듬이 되려면 취하는 이뿐 아니라 주는 이도 먹여 살려야 한다. 라이어널은 이제 유능한 선생이기도 해서, 많은 학교에 초청받아 야생 동물과 보전에 대한 전통 지식을 나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28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원의 행위다. 오염된 물과 메마른 땅뿐 아니라 세상과 우리의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존경심을 복원해야 한다. 

도시는 동물 세포 속 미토콘드리아와 같다. 먼 초록 지대에서 광합성하는 독립영양생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소비자인 것이다. 도시 거주자들이 땅과의 직접적 호혜성을 실천할 수단이 거의 없다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도시민들이 자기가 소비하는 것의 원천으로부터 분리되었을지는 몰라도 돈을 어떻게 쓰는가로 호혜성을 실천할 수는 있다. 우리 소비자는 효과적인 호혜성의 수단을 바로 우리 호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화폐를 호혜성의 간접적 수단으로 쓸 수 있다. 

받드는 거둠은 우리의 구매행위를 판단하는 거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받드는 거둠을 뒷받침하는 일에 쓰일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의 구매 행위는 소비되는 생명의 값어치가 있는가? 받들지 않는 거둠에 공모하는 나는 과연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290

아무리 애써도, 숲에서 내가 느끼는 약동하는 유정성은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파는 것은 전부 죽어 있다. 294

계곡 너머 하늘여인 숲은 한 번도 경작되지 않았기에 아직도 온전 하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원래 숲바닥을 잃었다. 리크로 빽빽한 숲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간과 우연에만 맡겨두면 나의 개간된 숲에는 리 크나 연령초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리크와 연령 초를 돌벽 너머로 나르는 것은 나의 임무다. 몇 해가 지나면서, 내 언덕에 새로 심은 리크밭에서는 4월에 생생한 초록의 작은 군락이 생 겨났으며 리크가 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내가 나이를 먹었을 때 바로 여기서 봄 만찬을 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그들은 내게 주고 나는 그들에게 준다. 호혜성은 먹는 자와 먹히 는 자 둘 다를 풍요롭게 하는 투자다. 297

리크와 연령초를 돌벽 넘어로 나르는 것은 나의 임무다. 야생의 리크와 야생의 개념이 위험에 처했다. 둘 다 옮겨 심어 탄생지에 돌아오도록 길러야 한다. 벽 너머로 옮겨 받드는 거둠을 회복하고 약초를 되살려야 한다. 298

 

 

나나보조의 발자국을 따라:토박이가 되는 법 In the Footsteps of Nanabozho: Becoming Indigenous to Place

전설에 따르면 조물주가 네 가지 성스러운 물질을 모아 으뜸사람을 빗고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거북섬에 정착시켰다고 한다. 만물중에 마지막으로 창조된 으뜸사람이 받은 이름은 나나보조였다. 조물주는 누가 찾아오는지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네 방향으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반은 사람이요 반은 마니도(힘센 영적 존재)인 나나보조는 생명력의 화신이요, 아니시나베 문화의 영웅이요, 인간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준 위대한 스승이다. 으뜸사람 나나보조의 형상을 한 우리 인간은 대지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막내이며 이제야 갈 찾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302

아니시나베 연장자 에디 벹넡-바나이는 나나보조가 맡은 첫 임무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다시 들려준다. 그것은 하늘여인이 춤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세상을 걷는 것이었다. 그가 받은 명령은 "걸음걸음이 어머니 대지님에게 드리는 인사가 되도록" 걷는 것이었으나, 그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직 확실히 알지 못했다. 다행히도, 그의 발자국이 으뜸사람의 발자국이기는 했지만 이미 이곳을 보금자리 삼은 뭇 생명들의 발자국을 따라갈 수 있었다. 

콜럼버스 이후로 여러 시대가 지났건만 원주민 연장자 중에서 가 장 지혜로운 이들은 우리의 해안을 찾아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직 도 궁금해한다. 그들은 땅이 겪은 피해를 쳐다보면서 말한다. "이 새 로운 사람들의 문제는 두 발을 해안에 디디지 않는다는 것이야. 한발은 여전히 보트에 있어. 그들은 자기네가 머물러 있는지 아닌지 모 르는 것 같아." 사회 병리와 무차별적인 물질주의적 문화에서 망향으 의 열매, 뿌리 없는 과거를 보는 현대 학자들에게서도 같은 말을 들 을 수 있다. 미국은 두 번째 기회의 보금자리로 불렸다. 사람과 땅을 위해 버금사람이 해야 할 시급한 임무는 식민주의자의 방식을 버리 고 토박이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민자 나라의 국민인 미 국인이 이곳에 뿌리 내리고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두 발을 해 안에 디딜 수 있을까? 305

나나보조의 여정은 처음에는 그를 떠오르는 태양으로, 날이 시작되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는 걸어가면서 어떻게 먹어야 할지 궁리했다. 이미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는 으뜸명령을 곱씹어보고서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이 땅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역할은 인간으로서 세상을 다스리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법을 세상으로부터 배우는 것이었다. 305

나나보조는 땅을 계속 탐사하면서 새로운 임무를 받았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이름을 익히는 것이었다. ... 그가 남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그가 지나갈 때 그들이 그를 '보조!'라고 불러주자 그는 더는 외롭지 않았다. 306

사람들은 대부분 이 근연종들의 이름을 모른다. 사실 볼 기회도 거의 없다. 이름은 우리 인간이 서로와 또한 생명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주위에 있는 식물과 동물의 이름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어떨지 상상해보려고 해쓴다. 내 입장에서 그러기란 여간 힘들지 않지만, 도로 표지판을 읽을 수 없는 외국 도시에서 길을 잃었을 때처럼 조금은 두렵고 혼란스러울 거라 짐작해본다. 철학자들은 이런 고립과 단절의 상태를 '종 고독'species loneliness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름 지어지지 않은 깊은 슬픔으로, 나머지 창조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관계를 상실했을 때 일어난다. 세상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이 커질수록, 이름을 부를 이웃이 없어져 우리는 더욱 고립되고 외로워졌다. 조물주가 나나보조에게 맡긴 첫 임무가 이름 짓기였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307 

나나보조는 모든 존재가 한 언어를 말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모든 피조물이 서로의 이름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한다. 308

나나보조는 자신에게 선물을 나눠준 여러 식물에게도 가르침을 받았으며, 늘 최대한의 존경심을 품고서 선물을 대해야 함을 배웠다. 식물은 대지에 누구보다 먼저 발을 디뎠으며 세상을 파악할 시간이 많았다. 

나는 오랫동안 앚아 있다. 시트카 할머니의 가지에 부는 바람 소리가 말들을 흩어버려 나는 월계수의 맑은 목소리, 오리나무의 재잘거림, 지의류의 속삭임에 멍하니 귀를 기울인다. 나나보조와 마찬가지로, 식물이 우리의 가장 오래된 스승임을 나도 깨우쳐야 한다. 

 

질경이, Plantago major "백인의 발자국"

 

질경이, Plantago major



새 대룩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반면교사 이민자 식물도 있다. 하지만 질경이님은 그렇지 않다. 그의 전략은 쓰임새를 지니고, 좁은 곳에 비집고 들어가고, 마당에서 남들과 공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었다. 어찌나 널리 퍼지고 잘 섞여들었던지 우리는 그가 토종인 줄로 안다. 그는 우리 것이 된 식물에 식물학잗ㄹ이 붙이는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토종 식물이 아니라 '귀화식물'이다. 315

버금사람에게 부여된 임무는 칡(외래침입종)의 뒤를 따르지 않고 '백인의 발자국'의 가르침을 따라 장소에 귀화하도록 애쓰고 이민자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소에 귀화한다는 것은 이곳이 내 배를 채워주는 땅인 것처럼, 내 목을 축여주는 개울인 것처럼, 이곳이 내 몸을 빚고 내 영혼을 채우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뜻이다. 귀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조상이 이 땅에 누워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선물을 주고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 귀화한다는 것은 자녀의 미래를 염려하며 살앙가는 것, 우리의 삶과 모든 친척의 삶이 여기 달린 것처럼 땅을 보살피는 것이다.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