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근대성 극복하기 (OVERCOMING MODERNITY)
『종교와 허무』의 결말 부분에서 니시타니는 평생에 걸쳐 답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답을 내리지 못한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역사 의식은 그 후 서구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근대에 들어와 인간의 삶 자체가 인간의 역사적 자의식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에는 무엇이 관여하고 있는가?"
니시타니는 서구와 동양의 차이를 서구가 더 강력한 역사 의식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에서 찾습니다. 이러한 역사 의식이 왜 동양에서는 발전하지 못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동양에서의 기술과 시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핵심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니시타니의 초기 경력 시절부터 그를 괴롭혔으며, 그의 정치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니시타니가 가담했던 '근대성 극복' 기획의 실패 사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역사 의식의 필요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940년에서 1945년 사이, 니시타니는 교토학파 동료들(코사카 마사아키, 코야마 이와오, 스즈키 시게타카 등)과 함께 '근대성 극복' 기획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니시타니의 근대성 극복 기획은 일본의 전통 문화로 돌아가, 16세기와 19세기에 강제로 부과된 서구의 문화와 기술을 초월하려는 열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니시타니에 따르면 서구의 문화와 기술은 전통과 근대적 삶 사이에 거대한 간극을 만들었으며, 불교와 유교는 더 이상 정치적·문화적 삶에 효과적으로 관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찰은 당시 중국 사상가들의 고민과도 공명했습니다.
니시타니의 스승인 **니시다 키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는 **'절대 무(絶對無)'**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니시다는 왕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 가르침을 피히테의 '사실적 행위(Tathandlung)' 및 윌리엄 제임스의 '순수 경험' 개념과 결합하여 읽었습니다. 니시다는 서구가 존재(Being)를 실재의 지반으로 여겼다면, 동양은 **무(Nothingness)**를 지반으로 삼았다고 주장합니다. 니시다에게 절대 무는 '만물을 포섭하는 보편'이자 서구의 '물질주의'에 더해져야 할 '영성적 정수'였습니다. 이 절대 무 개념은 니시타니에 의해 정치적·역사적 개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니시타니는 **'허무주의를 통한 허무주의의 극복'**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를 통한 민족주의의 극복'**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근대 국민 국가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세계사의 관점에서 일본이라는 국가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민족적 자아로부터 **민족적 비아(non-ego)**로의 도약'이라 불렀습니다. 교토학파는 헤겔의 이성적 관념론과 랑케의 도덕적 에너지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사 철학'**을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교토학파에게 내려진 세계사적 사명은 서구적 근대성(국민 국가, 자본주의, 개인주의 등)의 교착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획을 실현할 유일한 길은 **'총력전(總力戰)'**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전쟁은 새로운 주체성을 탄생시키고 절대 무를 실현하기 위한 '가속주의적' 전략이자 정화의 과정이었습니다. 코사카 마사아키는 **"세계사는 연옥(purgatory)이다"**라고 선언하며 전쟁을 통해 인류의 영혼이 정화된다고 보았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은 근대성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과 전략을 취했습니다. 모종삼은 중국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서구의 과학 기술을 '분유'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한 반면, 니시타니는 절대 무의 지반 위에서 세계사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 했습니다. 모종삼은 나중에 천태종의 **'원교(圓教, 완벽한 가르침)'**를 통해 현상과 본체의 존재론적 차이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모종삼이 도덕적 관점에서 출발한 반면, 니시타니는 종교적 관점(절대적 모순과 자기 분열로서의 실재)에서 출발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지만 두 기획 모두 실패했는데, 이는 기술의 질문을 충분히 진지하게 다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질문으로 돌아가 글로벌 자본주의나 절대적 형이상학적 지반에 종속되지 않는 새로운 세계사를 열어젖힐 수 있는 **복수주의(pluralism)**를 확보해야 합니다. 니시타니는 역사 의식이 서구 기독교의 종말론과 선형적 시간관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불교는 시간의 부정적 측면(무상함, 고통)에만 집중하여, 매 순간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역사적 장으로서의 세계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니시타니는 하이데거를 따라 역사학(Historie)과 역사(Geschichte)를 구분했지만, 불교적 깨달음인 **'돈오(頓悟)'**는 시간을 초월하는 '초역사'에 가깝습니다. 결국 동아시아 사유에서 시간은 정교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초월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 베르나르 스티글러는 역사 의식이 복제, 인쇄와 같은 기술적 조건 없이는 불가능함을 보여줌으로써 하이데거를 비판했습니다. 세계사는 단순히 '내면의 역사'가 아니라 기술적 대상이라는 '삼차 보유'에 의해 구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 의식의 배후에는 기술적 무의식의 작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 인쇄술과 같은 기술적 지지대가 있었음에도 역사 의식이 발전하지 않은 이유는, 지적 직관을 통해 본체(noumenon)에 도달하려는 철학 체계가 이러한 기술적 기억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기(器)**는 도(道)를 표현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역사적·시간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고찰되지 않았습니다. 장학성과 위원이 도와 기의 관계를 역사화하거나 도구화하려 노력했지만, 이러한 기술적 의식은 곧 중국적 사유(중체)와 서구적 기술(서용)을 분리하려는 이원론적 태도에 의해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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