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혁명_김형효 철학산책

'생각하는 사람'과 '미륵반가사유상'

백_일홍 2017. 7. 27. 13:21


로댕의 조각, 지옥 같은 세상에 대한 고통과 찌푸린 불만스러운 얼굴이 긴장한 근육과 함께 나타나 있지만, 신라의 저 사유상에는 그런 능위적 의지나 불만스런 세상에 대한 저항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거기에는 부조리한 세상을 모두 바꾸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목이 터져라 진군가를 부르는 이상주의자들의 혈기가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인류는 저런 이상주의자들의 기개를 너그럽게 봐주었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저들의 생각이 가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저런 이상주의자들이 헛농사를 지어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 깨달음은 세상을 새로 만들려는 이상주의적 구상을 흩어 버리려는 철학 사상인 해체 철학의 등장과 맞물려 있다. 


서양의 해체철학은 동양의 불교, 노장 사상과 서로 통한다. 세상은 인간의 이상적 생각을 적용시켜 수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고, 도덕적 당위의 명령에 복종하는 기계도 아니다. 


세상은 객관적 대상 처럼 마음 앞에 서 있는 실재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마음의 기가 동시에 표출하는복합적 욕망들의 그림이다. 그래서 세상은 욕망들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주의와 도덕주의도 세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적 설계로 세상을 다시 고치겠다는 발상도 형이상학적 소유욕의 하나이다. 


이상주의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이념이 보편적인 진리라면, 그런 이념을 소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를 모독하는 말 아닌가? 


보편적인 진리가 해와 달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허구이다. 


세상이 마음의 욕망이 그린 사이버라면, 그것을 아무리 고치려고 애써 봐야 헛수고밖에 더 되겠는가?


우리는 세상을 우리의 이상대로 바꾸려는 설계도를 작성하기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욕망을 바꿔야 한다. 즉 세상을 형이상학적으로 형이하학적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을 존재론적 욕망으로 마음의 방향을 전회해야 한다. 


* 존재론적 욕망. 

마음은 기의 욕망. 인간의 마음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하는 기호와 같다. 마음의 기호는 두 가지. 하나는 소유하려는 본능적 기호로 세상을 장악하려는 욕망. 다른 하나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처럼 세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긍정하면서 세상에 이익을 시여하려는 본성적 기호. 존재론적 욕망은 주려는 욕망임. 


미륵반가사유상은 세상의 더러움은 본디 세상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마음들이 소유욕고 자아 의지로 비뚤어져서 생겼다고 믿는다. 저 사유상은 자아의 선의지로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생각을 그치고, 소유욕과 자아 의지를 버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한 사유는 지옥 같은 현실을 뜯어고치겠다는 능위적 사고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본성이 이익의 꽃을 피워서 세상에 그것을 보시하게끔 본성의 사유가 나타나기를 안온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코기토는 자아의 자존심과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욕망을 결코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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