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_정화

제29구.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백_일홍 2020. 1. 22. 07:46

(법성게) 제29구.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마침내 실제의 중도자리에 앉으니

 

중도의 자리란 어느 특정한 시공의 자리가

아니라, 온 생명이 어울려 있는 한 삶으로서의 자리를

말하고 이것을 화엄이라고 합니다.

'마침내'란 다시 처음을 포함한 말로, 처음과

끝이 없는 데서 처음과 끝을 세우니

그것이 진여법계에서 말하는 중도의 자리입니다.

 

(법계의 노래)

 

깨달음을 향해 수행하고 있지만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으로 삶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니

생명의 활동은 언제나

인연으로 깨달음을 나투고 있어서지요.

 

그러므로 마침내 깨달음에 앉는 것이 아니지만

집착된 마음을 쉰다는 뜻에서 보면

깨달음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수행은 중생이 부처되는 길.중도

 

중도란

생사를 싫어하는 마음도 쉬고

열반을 좋아하는 마음도 쉰

평안한 마음으로

 

인연따라 변하는 무상을 제대로 알아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수행자의 길이면서

온전한 삶을 사는 모습으로

모든 괴로움을 떠나 평안함을 나누는 자비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람없이 주는 이웃하는 생명들의 나눔으로

뭇 생명들이 살아가지만

낱낱 생명들이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에서 보면

받고 있는 것이니

 

나눔도 받아들임도 모두

비움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나눔으로

중도

 

법계는 언제나 비움인 중도를 실천하면서

모든 생명들이 삶터가 됐으니

법계가 나눔과 받아들임을 통해 항상

빈자리를 만들어내는 미묘함이

깨달음을 나투는 것이겠지요.

 

(강설)

중도, 실천으로 나타나는 불성

 

여기에서는 '실제의 중도'라고 하고 있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란 진여이고 법성이고 법계이고 여래이고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도란 모든 행동에서 실제가 그대로 드러냐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이해가 아니라 중득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게송에서 "증지라야 알 바"라고 했습니다. 증지란 순간순간 깨달음으로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증득하고 나서야 실천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실천 그 자체가 수행이어야 합니다. 앉을 때는 앉아 있음으로 전체가 되어야 하고 이야기할 때는 이야기로 전체가 되어야 하고, 일할 때는 일로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라고 하는 것이 단지 인연조건에 의해서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잠깐이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라고 하는 생각을 완전히 비운 데서 전체가 자기로서 드러나며, 이때만이 인연조건으로 잠깐 있는 '나'가 불성의 온전한 표현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은 수행 방법이나 지역의 차이로 그 높낮이를 정할 수 없습니다. 오직 언제 어디서나 빈 마음의 실천인 중도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 있지 않는가에 의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갈수록 중요한 것은 학습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들은 여러 매체의 광고나 교육 탓에 잘못된 정보를 너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중도 수행의 본질은 억지 조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게송에서 말하는 중도의 자리란 어느 특정한 시공의 자리가 아니라 온 생명이 어울려 있는 한 삶으로서의 자리를 말하는데, 이것을 화엄이라고 <화엄경>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티끌 속에 우주 전체가 들어 있고 한 생명을 생명이게 하기 위해서 우주법계가 그와 같은 인연으로 존재하고, 한 티끌이 우주 전체를 이루고 한 생명이 우주 전체 생명을 이루고 있는 화엄의 법계연기에 투철히 깨어 있어야만 시대의 어둠을 빛으로 돌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완성해야 할 열 가지가 있으니 십바라밀입니다.

1.보시바라밀. 자비의 실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첫 걸음.

2.지계바라밀.

3.인욕바라밀.

4.정진바라밀.

5.선정바라밀.

6.반야바라밀.

7.방편바라밀. 육바라밀의 완성으로 중생의 근기따라 갖가지 방편을 시현하여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끈다. 곧 모은 중생의 행을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자비를 펴는 것.

8.원바라밀.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완성하며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

9.역바라밀. 빈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위한 실천은 그대로 자리가 되면서 그 힘을 당할 바가 없으니 이를 힘의 완성이라 함.

10.지바라밀. 후득지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속지를 강조한다.

 

이와 같은 십바라밀은 중생의 편에 서서 수행자의 중도실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