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_정화

제30구. 본래부동명위불불(舊來不動名爲佛)

백_일홍 2020. 1. 23. 07:23

(법성게) 제30구.

본래부동명위불불(舊來不動名爲佛)

옛부터 움직이지 않아 부처라 이름하네

 

옛부터 그대로인

빈 마음의 중도실천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형상이나 이념의 명사화를 떠나,

동사의 관계 속의 변화인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이름붙여진 연기실상을 말합니다.

 

(법계의 노래)

 

나눌수록 작아지는 것을 독점하려는 탐욕도 쉬고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아 일어나는 성냄도 없으면서

어울림만으로 살아가는 연기법을 사무치게 알 때

 

무상한 관계의 변화가 깨달음이 되고

함께 사는 삶이 자기가 되니

걸음걸음마다 평화로움으로 가득한 삶

부처님의 삶이 됐습니다.

 

깨닫고서 부처님의 삶이 되긴 했지만

나눌수록 커지는

법계의 생명나눔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에 흔들린 적이 없어

옛부터 움직이지 않아 부처라 하지요.

 

허나

무상한 변화는 쉼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갖는다고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중생의 삶을 부처되게 하는 것이니

 

걸음걸음마다 무상한 움직임이

도리어 평안함이 되어

움직이지 않는 부처님이 됐지요.

 

(강설)

관계 속의 변화인 비로자나 부처님

 

돌이켜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 보면 끊임없이 이 일 저 일로 마음이 들떠서 스스로도 힘들고 이웃도 힘들게 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도 소유하고 물질도 소유하고 있는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이름을 지어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은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형상으로 나타낼 수도 없는 것을 마음.영혼.정신.실체..신.부처라는 갖가지 이름으로 소유하고 있으니, 보이는 물질과 형상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모은 것이 소유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데,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현실이 또한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는 것인 줄 돌아보면 다 알 수 있는 데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업의 경향성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마음인 초심이 선의 마음이라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마음은 선에 대한 모든 분별을 제쳐놓았을 뿐만 아니라 업의 경향성을 떠나 있는 접점으로 곧 무소유의 공이며 연기실상을 그대로 나투고 있는 마음입니다. 250

 

그래서 마음다운 마음을 순간순간 살아 있는 마음이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마음으로 시공의 제한을 벗어난 마음입니다. 여기서 '옛부터'라고 하는 것은 시간을 직선으로 보고 시작과 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옛'이 아닙니다 시작과 끝을 갖는 시간은 늘 말했듯이 시공을 소유하는 것이며 삶을 삶답게 할 수 없는 원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어진 시공에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펼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인 줄을 사무치게 알 때 머뭄 없는 시공에서 무한한 창조가 가능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잃을 바 없는 곳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흔들림 없이 살게 됩니다. 그것이 '움직이지 않음'입니다.

 

소유에 이름 붙여진 모든 상에서 자유로워질 때가 움직이지 않음이고 이 마음이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수행, 곧 행을 닦는 다는 것은 소유를 이어가는 마음이 변계소집성에 따른 자아의식의 표현임을 확실히 알고 무소유의 빈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자신과 대상의 어떤 것에도 소유를 위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움직이지 않음입니다.

 

소유 없이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살 때, 과거가 우리를 지배하지도 미래가 우리를 지배하지도, 현재가 우리를 지배하지도 않으며, 삼세가 있되 삼세가 고정되지 않는 시간에서 삼세일 뿐입니다. 251

 

그렇기 때문에 '옛부터 흔들림 없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앞서 말한 중도의 자리에 앉아 있음입니다. 중도란 공이자 연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이면서 파도고 파도이면서 물이고, 물이면서 얼음이고 얼음이면서 물인 것 등의 접면으로 비유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은 어느 한 모습으로 고정될 수 없고 그 이면에 변화의 주체도 없으며 다만 전체의 관계에서만이 저 마다의 모습으로 나투고 있는 연기실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52

 

이 마지막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옛부터 그대로인 빈 마음이 중도실천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형상이나 이념의 명사화를 떠나 동사의 관계 속의 변화인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이름 붙여진 연기실상을 말합니다.

 

진리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중도의 실천뿐입니다. 온생명으로 사는 중도의 실천에는 인종이나 이념이나 종교 신념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형상이나 이념, 종교적 신념 말고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진실의 근거조차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업입니다.

 

바꿔 말하면 형상이나 이념에 의한 분열, 종교 신념, 스스로 세운 진리의 근거들이 실은 포장된 이기심, 자아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으 꿰뚫어 보는 것이 관입니다. 관으로 자아를 꿰뚫어 자아의식을 벗어났을 때만이 불교, 곧 깨달음에 대한 수행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이룬 사람을 우리는 부처라고 이름할 뿐입니다.

 

업의 중심인 자아의식을 완전히 비우고 깨달음이 일상이 되기를 빌면서 이만 법성게에 대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끝)